-
개미가 개미에게라윤영 톱날에 베인 나무처럼 공장에서 해고당했다호주머니에 남은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 몇 개공원 빈 의자에서 깡소주를 들이켠다이유 묻지 않는 낡은 의자가 자리를 내주었다땅바닥에 개미가 지나간다나도 가난한 일개미였다앞만 보고 가는 개미 앞을 딱 막아섰다멈칫 올려다 본 개미와 눈 마주친다개미를 보는 개미는 안다검은 몸뚱이 험한 세상 앞만 바라본 행로를밟혀도 죽고 강물을 만나 돌아가기도 하고때로 향기 좋은 꽃밭을 지나기도 했다푸른 이파리는 허공의 좋은 침대다나무에 올라가 운수 좋은 날하늘광장의 흰 구름 휘휘 저어 구름지도를
최한나 기자
2018.08.27 11:05
-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여름날이 흐르고 있다. 역대급 폭염에 쌩쌩 달리던 자동차들도 가로수들도 꽃들도 마냥 늘어지고 수박도
최한나 기자
2018.08.12 22:45
-
틈이 자란다고은수 미세한 틈도 놓치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법칙이다. 심심할 사이도 없이 무언가로 채워진다. 틈은 틈을 보라고 만든 말. 일부러 곁을 주는 것. 누가 와도 좋은 것. 왕복 8차로 노란 중앙선 위, 나무 한 그루 자란다. 인도코끼리 귀 같은 이파리를 펄럭이며 오동나무가 놀고 있다. 자동차가 쌩, 지나갈 때마다 잠시 어리둥절하지만 곧 싱그럽다.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방향으로. 목울대가 씩씩하다. - 고은수 시집 『히아신스를 포기해』(2018. 시산맥) 에서-------------- 시인의 눈은 틈새에 숨어있는 작은 생명력
최한나 기자
2018.07.24 07:50
-
늙은 독수리 서문기 창고 구석에 박힌 재봉틀 먼지 닦고 숨구멍마다 기름 넣고 바퀴를 돌리자 푸드덕 날개를 친다 이내 굶주린 허기를 채우려는 듯 드르륵, 드르륵 날개를 켜 비상한다 겨울들판을 가로질러 빙빙 맴돌다 먹이를 발견하는 순간, 돌격 내리꽂은 곳, 아지랑이 피어오른 시냇물 속 부리를 힘껏 조여 파닥거리는 밑실을 올려 챈다 줄줄이 끌려오는 겨우내 얼었다 풀린 풍경소리팥배나무 뿌리 돌아 바위틈 낮은 이끼를 깨우며 졸졸졸 박음질되어 오른다 돌개바람으로 흔들리는 삶의 자락 노루발톱으로 움켜쥐고 바람을 맞닥트려 바람을 탄다 늘였다 줄였
최한나 기자
2018.06.27 11:47
-
아모르 파티나병춘 감당 못할 마그마활화산 같은성난 사자의 포효 같은아득히 밀려드는광풍의 해일 같은아무도 어쩌지 못할운명,오도 가도 못할아모르 파티* 뚜벅뚜벅 걸어가리낙타처럼용감무쌍하게 맞으리무소의 뿔처럼기쁘게 맞이하리철부지 아이처럼 운명아어서 오너라아모르 파티 * 니체가 말한 ‘운명愛’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살다보면 때때로 위로나 격려 혹은 어떤 설교보다 시 한 편 한 줄이 전하는 울림이 무엇보다 더 강렬한 힐링이 되어줄 때가 있다. 시는 문자로 이루는 감성의 꽃이다. 이 꽃은
최한나 기자
2018.06.18 21:50
-
끝없는 이별최세라 흠 있는 사과라고 합시다씨앗까지 곰팡이 핀 열매라 합시다쩌그렁 울리는 양은 밥그릇 시절절로 읊어지는 그날 저녁의 외침들사랑이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굳이 사랑하려는 네 가 구질구질하다고사랑이 사랑으로 시들지 않으려면바람 불어도 겹쳐지지 않는 도미노처럼멀찍이 따로 서자는 그 말 방점들개나 줘버리고 돌아선 사랑개나 줘버린 두근거림개나 줘버린 긴 포옹개나 줘버린 눈맞춤과도로 떼어 먹기에도 울컥한사과라고 합시다 썩은 내가향기를 압도하는 검은환부라고 합시다늪이라고 합시다 냉큼개나 줘버리려고 손을 뻗으면집기도 전에 허물어지는내
문화
최한나 기자
2018.06.06 23:05
-
도깨비바늘풀성선경 이제 내 이름을 서러워하지 않겠다조금의 그리움으로도 목이 메어옷섶이나 바짓가랑이 혹은,삽살이의 그림자에도 맺혀서자잔히 묻어나는 나의 사랑이제는 용서하겠다풀꽃답게 피었다 시드는 꽃을 맺어도나의 감성이 예쁜 덧니로 돋아나도세상은 때때로 물뱀보다 독사 같아서이 징글시런 놈 혹은이 낮도깨비 같은 놈하고 욕을 퍼부어도나의 끈끈한 사랑 변명하지 않겠다풀꽃 중에서도 더 아름다운 화초이기를이름 중에도 더 빛나는 명사이기를꿈꾸지 않겠다그냥, 낮도깨비 같은 도깨비바늘풀--------------------치마에 붙은 도깨비바늘들을 떼
최한나 기자
2018.05.30 07:33
-
-
-
-
-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유하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죽도에 가서 알았다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어스름의 해변가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옛날 떡장수 어머니와천하 명필의 부끄러움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나의 시는 어떤가?오징어 회를 먹으며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뼈 있는 물음 한마디 ------------- 우리의 시각이 시적이라면 우리 주변엔 시적인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시인의 눈은 오징어 회
최한나 기자
2018.04.16 08:48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