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 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언제 죽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자신이 죽는 날짜를 미리 알고 있다면 이세상이 유지 되질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의 끈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죽음관을 보면 인간의 죽음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정해주신다. 주님께서 부르는 때가 오면 기꺼이 생을 바치는 자세를 취한다. 고통이 없는 곳,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나라로 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음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사후에도 구원을 받을 것이며, 부활과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는다. 불교의 죽음관은 윤회에 기반을 둔다. 죽는다는 것이 새로운 윤회의 시작을 의미한다. 윤회를 끊는 방법은 있다.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열반에 들지 않은 사람의 혼은 49일 동안 죽은 상태인 중유(中有)에 머물다가 생전에 지은 업(자신의 행위)에 따라 새로운 생으로 태어난다.

 

석가의 죽음은 달관의 경지를 넘어 오히려 낭만적(?)으로까지 보인다.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파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것이다. 익은 과일이 언젠가 땅에 떨어지는 성질이 있고, 유리가 깨지는 성질이 원래 있듯이 사람의 생명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된다는 것이다. 제행무상의 참의미는 모든 것이 무상하니 허무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다. 유한의 인생이니 한 시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 자체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종교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29세의 여성이 지난 1월 말기 뇌종양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존엄사를 허용하는 오리건 주로 이사를 감행했다. 그리고 30회 생일을 몇 주 앞둔 11월 1일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고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미국 50개 주에서 유일하게 다섯 개 주에서만 존엄사를 허용하는데, 오리건 주에서만 지금까지 750명이 존엄사를 택했다고 한다.

 

또한 삶이 너무 버거워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2013년에는 전국 사망자 중 자살자가 28.5%로 1만 4427명이었다. 이는 전년 대비 1.5% 증가했고, 10년 전과 비교하면 26.5% 증가했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교통 사망률도 2002년 인구 10만 명 당 25.2명에서 2012년 13.9명으로 44.8% 낮아졌지만 멕시코(17.4명), 칠레(14.0명)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높다.(보건사회연구원) 타인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다. 몇 년 전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유영철 사건을 우리는 소름끼쳐하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최근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지하조직(ISIS)에 의해 자행된 참수 장면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악무도한 행동을 보는 것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한국의 살인률을 살펴보면 10만 명 당 2.6명으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나타낸다. 폭력욕구를 연구하는 기관에 의하면 아시아 대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범죄율이 낮아 살인률도 높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살인률은 이웃나라 일본보다 무려 6.5배나 높고, 중국보다도 2.6배 더 높은 수치로 나타난다.(UNODC) 이것이 우리들의 슬픈 현주소이다.

 

그러면 세월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다. 그런데 안전에 대해서는 세계 최하위 후진국이란 것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송파에서 일어난 환풍기 추락사고, 담양 펜션의 화재사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만 안전에 신경 쓰면 피할 수 있었던 사고들이었다. 선진국들이 인명을 하늘처럼 중시하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인명사고 정도는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해온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이건 창피한 정도가 아니다. 세월호에서 304명의 인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아직 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이 대다수이다.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 아이들은 부모들을 또 다른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들 중 아직도 아홉 명의 소중한 생명이 차가운 물속에 잠겨있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아무도 책임지는 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더욱 슬퍼해 하는 이유이다.

 

청운대학교 베트남학과 이윤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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