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명찰, 하얀명찰

 

서울구치소 교정위원 김 필 연

 

가수 현철이 불러 힛트를 시켰던 대중가요중에 이름표라는 노래가 있다. 성인들이라면 한두번쯤 따라 불러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자신을 대신할 이름이 지어진다.

 

대통령,장군,의사,박사,연예인,기업의총수 등 세상에 나가 성공을 바라는 부모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름들이 지어지게 된다.양반과 상놈이 공존하던 과거, 소위 명문가 집안에서는 자녀들의 이름 하나도 소홀하게 짓는 법이 없었다.

 

세상의 이치와 우주의 오행을 따져가며 덕망과 학식을 갖춘 학자나 선비들에게 부탁해 후대에 자신들의 자녀가 세상에서 큰 사람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 석자를 정성을 들여가며 짓기도 했다.반면에 서민층들은 이름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워낙 자식들을 많이 낳다보니 개똥이, 쇠똥이, 끝난이, 간난이, 미자, 말자, 순자, 영자, 춘자 등 먹고살기 힘든시절 부모가 아무 생각없이 지어주면 그것이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알고 살아가야 했다.

 

필자가 왜? 이처럼 이름을 들먹이는 이유는 이름이 좋고 나쁨을 떠나 범죄에 한번 잘못 발을 들이면 부모가 정성을 들여 지어준 이름이나 막지어준 이름이나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귀하게 지어준 이름일지라도 평생을 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름표보다는 명찰을 달고 인생의 절반을 살아 간다.

 

명찰은 초등학교(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때에는 1학년 노랑색, 2학년 하얀색, 3학년 빨간색 이렇게 학년 구별을 위하여

색깔별로 명찰을 구분했다.가슴위에 붙어있는 명찰만 보면 누가 몇 학년인지 알 수 있도록 무언(無言)의 표시를 하는 색깔 구분이었다.

 

필자도 여고시절 때 이름을 남학생들한테 안 보여주려고 주 머니 안쪽으로 숨겨 다녔던 아련한 옛 생각이 떠오른다.

 

이렇듯 우리는 명찰 하나만을 가지고도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아련하고, 아름답고, 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래서 더욱  생각나는 그리운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 가고픈 생 각이 들 것이다.

 

필자가 거듭해서 명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명찰의 색갈 하나만으로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외롭고 쓸쓸히 우리의 관심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이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혹자는 의아해하며 명찰의 색갈이 생과사의 갈림길에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필자는 명찰의 색갈 하나만으로 세상을 모두 얻은 듯 기뻐하는 어느 사형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하얀집이라고 불리는 곳을 우리는 교도소라 말한다.이곳에 수감된 수영자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가슴에 이름표대신 죄수의 번호표를 달고 하루하루를 지내며 살아간다.

 

수영자들이 달고있는 빨간색 명찰과 하얀색 명찰은 삶과 죽음이 담겨있는 무언(無言)의 표시다.교도소에서는 가장 무서워하는 명찰이 빨간명찰이다.

 

사회에서 성추행범들이 달고 다니는 전자팔찌는 그들이 성추행범들이니 조심하라는 증표이며 꼬리표다.그들은 수사기관에서 24시간을 관찰하고 집중 관리를 받는 것 처럼 수영자들 사이에서도

빨간명찰을 달고 다니는 수영자는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대상이다.

 

전자팔찌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듯이, 교도소 안에서도 빨간명찰이 가장 최고의 형을 받았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수용자들끼리도 모른척 하지만 사실은 한번 더 처다본다.빨간 명찰을 그많큼 죄의 무개 많큼이나 다른 수영자들에 비해 마음속으로 죄의 댓가를 더 많이받고 살아가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빨간명찰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사형수 상담을 13년째하고 있다.

 

어느날 아들이 엄마 어디가세요?라고 묻는다. 서울구치소 상담간다고 했더니 아들은 대뜸 질문을 던진다. “ 엄마는 사형수한테 피해를 본 가족들을 생각해 보셨어요? ” 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아들은 내가 사형수 상담하는 것을 알고 있다.

 

아들의 질문을 받은 나는 괜스리 머리가 복잡해진다.피해본 가족들을 위해서 그들을 또 버려야 된다는 뜻인가!라고 반문해 본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들을 잘했다거나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죄를 짖는다면 죄의 댓가는 당연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이들은 법에따라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았고 더이상 자신의 죄를 정당화 할수는 없다.다만 이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고귀한 생명을 빼앗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고통만을 주었을뿐이다. 따라서 지금은 참회하는 길 외에는 이들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자는 상담을 통해 이들의 마음에 짐을 조금씩 내려놓을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다.이들의 진심을 들어주고 사랑도 나누어주며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있는 조그만 소망이라도 이루어 지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이 피해자가족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며 눈물로 상담을 해오면 필자는 기도와 참회하는 길 뿐이라고 따듯하게 말한마디 건네기도 한다.이들은 그 말한마디에 순종하며 자신이 그 약속많큼은 꼭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는 눈빛에서 더이상 흉악한 범죄자의 얼굴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필자가 상담한 최고수는 보기에도 너무나 선하게 생겼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많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교도소 안에서도 그 친구가 사형수라는 것이 믿어지지를 않는다고

교도관들 역시 말한다.

 

그럼 왜 그는 그렇게 엄청난 범죄를 저질렸을까? 누구나 인생을 복기(復棋)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세상에 죄인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최고수들은 한결같이 정말 그때,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지 않았으면 그런 끔찍한 범행을 하지 않았을텐데라고 자신들의 죄를 후회한다.불교에서 말하는 악연이라는 것이다.어떤 이유에서든 죄를 짓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범죄의 종류는 두가지가 있다. 고의성과 순간적인 실수다.그러나 고의성이냐 순간적인 실수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사건은 늘 우리들 곁에 존재한다.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명분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인해 이 친구는 법에서 정해진 법에따라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았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된다. 그 실수가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도있다.법을 다루는 사법기관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그곳에도 실수는 존재한다.

 

한 생명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는 법정은 그래서 중요하다.모든 국민들에게 정직해야하며 투명해야하고 법과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단 한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잘못된 판결로 인한 피해자가 나와서도 안된다.

 

필자가 상담을 해오던 빨간 명찰의 사형수를 7년정도 상담했을 때의 일이다.항상 성실하고 모범적인 수영생활을 하던 이 친구가 빨간명찰의 사형수에서 하얀명찰의 무기수로 바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2008년 1월이다.

 

형이 감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너무나 감격했다. 그것도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바뀌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상상이 되지 않고 꿈만 같았다.

 

나는 이 기적같은 일을 한시간이라도 빨리 가족에게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먼저 부모님한테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

 

6년전만 해도 지금처렴 휴대폰이 많이 보급이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의 부모님 역시 시골에서 생활을 하고 계셨기에 이런저런일로 전화를 받을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통화가 되어서 전화기를 붙들고 나와 부모님은 같이 울었다.

 

필자는 몇일 동안 마음이 들떳다.괜히 내 스스로가 큰일을 한 것처럼 마음의 설레이고 감정이 달아올라 달리 표현 할 길이 없었다. 나는 무조건 빨리가서 만나보고픈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그 다음날 필자의 발걸음은 교도소로 향했다. 축하 케익을 사가지고 가서 축하를 해주고 이 친구를 붙들고 한없이 기뻐했다.

 

정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 된다는 것은, 죽음에서 해방되어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사형과 무기징역의 차이는 삶의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이기도 하다.

만일 시기적으로 그를 사형 집행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벌서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생각만해도 끔직하다.

 

지금 이 친구는 수용생활을 열심히 잘하고 있다.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는 마음으로 교도소안에서 배우는 양장기술 1급 자격증을 획득하고 또 모범수가 되었다. 그러면서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으로, 한사람한테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주변에는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생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결국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이웃이 아파하고 사회는 혼탁해 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나만의 세상이 아니요 우리 부모, 형제, 이웃 친구 동료들이 함께 어울어져 살아가는 모두의 세상이며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공동체이다.

아무런 개념없이 무기력하게 살아 갈것이 아니라 희망과 꿈을 안고 무슨 일에든지 내가 아닌 가족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따스함이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사형이라는 무서운 형벌은 받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수가 무기수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구나

공평하게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창조주가 보내준 죽음의 초대장을 받는다.그러나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태어난 순서대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죽음에는 순서가 없으니 누가 먼저 가고,

누가 늦게 갈 지 모른다.인간사가 새옹지마(塞翁之馬)이기 때문이다.

 

사형수들에게는 죽음의 순서가 정해져 있다.이들은 언제든지 이슬의 현장으로 불려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까지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회가 정의롭고 살기좋은 사회가 되기위해서는 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 놓아도 국민들이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제대로 찾아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남의 아픔도 내 아픔처럼 어루만져줄 수 있는, 밝고 즐거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제 2014년도 끝자락에 와 있다. 가까이 있는 내 이웃을 한번 더 보살펴 주는 마음과 과연 내가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인가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내탓이요"하는 글귀가 더 생각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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