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는 존경심을 요구하지만, 리더는 존경심을 이끌어낸다.” 보스와 리더의 차이다. 조직이론의 권위자 에치오니(Etzioni)는 아랫사람이 선호하는 방향을 방치해 두는 것이 권력이라면, 윗사람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했다.

 

위계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리더라는 말은 보스(boss)라는 개념과 구분 없이 쓰인다. 리더십에서 상대개념인 팔로워십이 리더와 보스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팔로워십(followship)은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추종자의 개념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추종자들의 역량을 의미한다.

 

지금은 일인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는 지났다. 정치에서도 일인에 좌우되는 인물정치와 다수가 이끌어 가는 시스템정치가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자.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회의 말미에 김위원장이 노대통령에게 하룻밤 더 묵어 갈 것을 권장하였다.

 

노대통령이 그것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김위원장이 대통령이 그것도 혼자 결정 못하느냐며 핀잔 비슷하게 이야기 한 것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북한의 정치는 대표적으로 일인에 의해 좌우되는 인물정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경험으로 살펴 볼 때 인물정치는 독재정치로 흐를 가능성이 아주 많다. 반면 시스템정치는 법치를 따르는 민주적인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시스템이라는 말의 뜻은 “여러 개가 모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 과거에는 세계적인 발명품에는 발명자의 이름이 대개 붙여졌다. 뉴턴의 법칙이라든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 같은 인류 대 발명품에 여지없이 그들의 이름이 첨부되었다. 그런데 컴퓨터 같은 대 발명품엔 발명자의 이름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한사람에 의해 발명되지 않고, 다수에 의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분야 등 전 분야에서 일인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는 끝났다. 리더십에서 팔로워십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리더십을 보여준 리더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다.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세계의 인물에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소련의 스탈린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독재로 발전되는 것을 본 호치민은 베트남 공산당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권력의 일인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것이 집단지도체제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체제이지만 현재까지 베트남 공산당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장단점이 있지만 85년 동안 베트남을 통치해온 베트남 공산당은 있지만 아직까지 절대적인 권력자가 없다. 공산당 정치국원들이 만장일치제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야당이 존재하지 않으니 독재정권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공산당 내에서 권력 분산이 오래 동안 지속되고 있다.

 

호치민은 20세 쯤 베트남을 떠나 당시 조국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로 갔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지배국인 프랑스 즉, 호랑이 소굴로 들어 간 것이다. 프랑스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하던 호치민은 땔감이 없어 옆집 난로에 벽돌을 올려놨다가 밤에 와서 담요에 싸서 껴안고 잠을 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0년 동안 한 번도 조국에 땅을 밟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던 그가 베트남에 돌아와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고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가난한 국민들은 배가 고픈데 자신만 하루 세 끼니를 먹을 수 없다며 평생 두 끼 식사를 실천하였다. 그가 입었던 소박한 옷 또한 일반 백성들과 차이가 없었다. 결혼은 국민과 했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화려한 대통령 궁을 떠나 몇 평 안 되는 조그만 오두막집에 기거하며 평생을 보냈다. 지금도 그가 쓰던 초라한 사무실과 침실이 일반인들에게 전시되고 있다. 또한 가족이 있으면 욕심이 생긴다며 유일한 혈육인 형과 누나마저도 그들이 사망하기 전 단 한 번씩만 만났다.

 

그것도 대통령 궁이 아닌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만났을 뿐이다. 그는 또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수반들과 달리 유언장에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베트남의 영토가 넓지 않다는 이유였다. 화장을 해서 뼈 가루를 삼등분하여 북부, 중부, 남부 동지들에게 전달해 줄 것을 유언하였다. 그리고 남은 재는 양지바른 야산에 뿌려주고 주위에 나무를 많이 심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결국 후세들에 의해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시신은 지금도 문묘에 전시되어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하루에도 수 천 명의 베트남인들이 그의 묘소를 아직도 찾아오고 있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미국과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식은 전 세계에서 10만 명 이상의 국내외 조문객이 하노이 바딘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때 미국 시사전문지 “TIME"은 그를 표지모델로 선정하였다. 전시 중에 그것도 전쟁 상대국의 사망한 국가수반을 상징적인 매체에 크게 부각시킨 미국인들의 여유에 전 세계가 놀라기도 했다.

 

생전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조국과 국민이었다. 그 사상의 핵심은 베트남인의 자유와 행복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고, 자유를 얻고 나면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행복은 소박하였다. 베트남인들이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교육을 강조하였다.

 

요즘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우울한 소식을 접하고 있다. 4대강 공사 담합, 그 공사 후 막대한 유지비용, 각종 관, 군피아들과 자원외교의 실패 등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이 일들을 주도했던 리더들이 사욕이 없었길 간절히 바라고 싶다.

 

청운대학교 베트남학과 이윤범 교수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