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오랜 세월 왕조체제로 내려온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고조선으로 시작한 민족의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며 후삼국을 거쳐 고려로 통일된다.

 

고려는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현안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며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구축해왔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극심한 골육상쟁을 겪으며 국론이 분열되는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고 명분에 사로잡힌 성리학의 영향력 때문에 모두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에 매달리게 된다.

 

이로 인한 민생의 고초는 극에 달했으며 걸핏하면 쳐들어오는 중국의 침략과 일본과의 전쟁으로 나라는 초토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왕조와 그를 둘러싼 간신배들의 득세로 나라꼴은 엉망이 되었다.

 

결국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한다. 대원군은 세계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강행하며 천주교를 탄압하고 운양호 사건 등으로 스스로 외세를 불러들이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대포로 무장한 외국 흑선(黑船)의 위협 앞에 조선은 겨우 선진 각국과의 외교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불평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 함대를 무찌른 신흥 일본의 기세는 가히 천하를 깔아뭉갤 만큼 등등했다. 그들은 필립핀과 조선을 나눠가지겠다는 미국의 태프트와 일본의 가쓰라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극대화 되었다. 일본에 대한 조선민중의 저항은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거셌다.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궐기한 동학농민혁명운동은 경상도 충청도를 휩쓸고 급기야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정과의 타협으로 전국 모든 고을에 잡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집강소의 기능은 사실상 지방관아의 권력을 동학혁명본부에서 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조를 뒤엎고 새 정부를 개설하지 않았음에도 ‘동학혁명’으로 호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정에서는 힘이 모자라 동학에게 굴복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몰래 일본에 원병을 요청했다. 일본군은 최신무기로 완전군장을 갖춘 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 20만을 몰살시킨다.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장군은 대둔산을 거쳐 순창으로 몸을 피했다가 현상금에 눈이 뒤집힌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당시 조선정부가 엄연히 주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에 대한 재판은 일본영사관에서 진행했으며 사형으로 영웅의 일대기는 장엄한 막을 내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후 곧이어 강압에 의한 ‘합방’으로 나라를 잃는다. 1910년 8월 29일은 국치(國恥)의 날이다. 36년에 걸친 일제총독부가 막을 올린 날이다.

 

우리 민족은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며 3.1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이 국내에서 전개되며 중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윤봉길, 이봉창 등 애국 열사들의 몸을 던진 희생에 의해서 독립운동의 메카로 자리매김한다.

 

만주벌판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등 뛰어난 독립전쟁의 영웅들이 독립군을 조직하여 봉오동, 청산리 등지에서 일본 정규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얻기도 한다. 조선민족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회만 있으면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들도 점차 증가하는 것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독일 이태리와 함께 추축국을 이루고 동남아 일대를 모두 수중에 넣는다. 그러기 위해서 조선인 학병과 노무자를 강제징발하고, 공출을 강요하며, 심지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위안부를 강제로 끌어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들이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 있다가 7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재일교포로 살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70만에 이른다. 남북이 분열된 현실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있다. 민단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민단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체 민단 지원금은 80억 원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지원금 배분은 40%를 중앙민단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40%는 중앙민단이 주관하여 지방민단에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정책을 써왔다. 나머지 20%만 지방민단에 직접 지원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중앙민단이 주관하여 지방민단에 줘오던 40%를 직접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중앙민단이 지방 실정에 맞춰 효율적으로 배분하던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지 그 진의가 아리송하다. 더구나 중앙민단 지원예산 32억 중 40%(12억8천)는 재일민단 법인화 진전과 연계하여 지원을 보류하고 2015년 법인화 진전이 없을 경우 중앙민단에 대한 지원을 중앙본부 지원예산의 60%를 넘지 않도록 할 것 등을 결정했다고 한다.

 

민단 관계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버텨나가고 있다. 방만한 운영은 아예 생각도 못한다. 모자란 예산으로 재외동포교육, 한글학교운영, 문화 한상경제활동지원, 교류지원사업 등 교민들의 권익증대와 활성화를 위해서 발분망식(發憤忘食)한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입장이다. 한국정부는 이들의 자율성을 믿고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지원 대책에 재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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