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희 기자


 

캐비닛

진영대

 

 

사무실 한 켠에 낡은 캐비닛 하나 있다

칠이 벗겨져 녹물이 흐르고

상처가 깊다. 그의 몸에...

귀를 대고 다이얼을 돌리면

그때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린다

 

나는 언젠가 그를 열었던 적이 있다

다시 오마, 하고 그를 닫으며

비밀번호마저 그의 몸속에 집어넣고

닫아 버린 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그 동안 구석구석 녹물이 흘렀다

끝끝내 비밀번호를 알 수 없는 나에겐

열어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벽을 느낀다

나에게도 그런 비밀번호 하나가 있어서

녹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열어줄 때까지

사무실 한 켠, 나는 캐비닛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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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낡은 캐비닛이 녹이 슬어 비를 맞으며

녹물 가득한 눈으로 우는 걸 본 적 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엔 아버지의 철재 캐비넷이 있었다.

너무나 낡았지만 끝까지 아버지의 서재를 지키고 섰던...

아버지가 막내 녀석 바라보다 녹물 가득한 눈물을 보이며

떠나던 날, 결국 마당으로 들려나가 한 동안 녹물로 울던

캐비넷! 삶이란 이토록 덧없음을 가르쳐주고 떠났다.

지금 내 몸에서도 삐걱거리는 진동을 감지한다.

시큰거리는 관절들의 이 삐걱거림을 언제 내려놓게 될지

열어보고도 싶다.

하루하루가 총알 같기도 하고 금쪽 같기도 하다.

 

화자의 심상이 캐비넷에 투영된 묘사가 짠한 동병상련의

파문을 일으킨다. 누군들 세월을 거스를 수 있으랴?!

케비넷을 점검해 보는 날이다.

 (최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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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대 시인(1958~)

<실천문학> 등단(1997)

시집 『술병처럼 서 있다』 『6인 합동 시집』 외

시천지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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