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곳곳에서 문화를 즐기고 누리는 ‘문화융성’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대도시 뿐만 아니라 각 지역 소도시에서도 문화여가활동이 확대되고 문화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고 있다. 생활 속에서 문화로 기쁨을 느끼고 문화예술을 매개로 소통과 나눔을 이어가고 있는 지역의 사례를 소개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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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청호동 갯배. 편도 200원이면 갯배를 이용해 반대편 마을로 이동할 수 있다. 1950년대 당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강원도 속초 청호동. 안개가 자욱한 청호동 바닷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서 있는 작은 집들이 촌을 이루고 있다. 집 마당에는 새벽부터 고기를 낚아 온 60~70대 해녀들이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하나 둘 씩 바닷가에 둥지를 튼 것이 바로 이 곳 ‘아바이마을’이다. 금방이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긴긴 세월을 살아왔다.

아바이마을 새벽 6시 물질을 하러 나간 해녀가 집으로 돌아와 그물망에 걸린 고기를 떼고 있다.
강원도 속초 청호동의 한 집 마당. 새벽 6시 물질을 하러 나간 해녀가 집으로 돌아와 그물망에 걸린 고기를 떼고 있다.

 

함경도 실향민의 제2의 터전, 아바이마을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버틴 게 60년이다. 그들은 실향민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오며 바닷가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좁은 길을 따라 비집고 들어오는 바닷바람은 고향에서 불어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터라 빈손이던 그들에게 청호동 바닷가의 생활은 그나마 입에 풀칠할 거리라도 만들어줬다. 실향민들 중 남자들은 어부로 일하거나 여자들은 해녀로 물질을 하거나 바다에서 건져올린 오징어나 생선을 떼어내는 일을 하며 살았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 남은 아낙들은 어린 자식을 업고 행상을 하며 끼니를 연명하기도 했다.  

 

실향민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실향민 1세대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지난 2003년 430명이었던 65세 이상 실향민들은 현재 260명으로 크게 줄었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70대 이상은 70명이 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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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바다 앞에서 평생을 살아온 실향민들.

 

1.5세대, 2세대들은 고향 문화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함경도 민요인 ‘돈돌라리’를 불렀다. 돈돌라리는 ‘돌고 돈다’는 뜻이다. 돌고 돌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듯 고향에 언젠가 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 민요를 불러온 것이다.

 

1945년생 해방둥이인 김정순(70) 씨는 피난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훔쳤다.

함경남도 태생인 그녀는 5살 때 이 곳 청호동으로 내려왔다. 피난 통에 아버지는 헤어지게 되고 어머니가 5남매를 먹어살리며 생활한 곳이 바로 아바이마을, 즉 갯배마을에서 살았다. 아버지를 동해 묵호항에서 어렵사리 다시 재회하기 까지 안해본 일이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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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이 피난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피난민들의 설움 달랬던 ‘돈돌라리’

“당시엔 모래사장이었어요. 모래에 굴을 파고 집을 만들어 산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죠. 다섯살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내려와서 한 평생 고향을 그리워 하며 살았어요. 돈돌라리를 부르며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죠. 하지만 이젠 이 곳이 제2의 고향이 됐어요. 떠날 수가 없죠.”

 

강인숙 씨(78)는 함경도 태생인 남편과 아바이마을에 정착했으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지금까지 아들 넷을 키우며 이 곳을 지켜왔다.

 

“바가지와 양은대야를 이용해 집에서 민요를 흥얼거리던 것이 돈돌라리죠. 총알이 마을 곳곳에 쏟아지던 난리 통에서도 안해본 일이 없어요. 너무 고생스러워서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힘을 내고 또 버텼어요. 한번씩 지칠 때면 돈돌라리를 부르며 시름을 잊곤 했어요.”

아바이마을 실향민 1~2세대들이 ‘돈돌라리’를 부르고 있다.
아바이마을 실향민 1~2세대들이 ‘돈돌라리’를 부르고 있다.

 

실향민문화 전승하기 위한 2세대들의 노력

속초시와 속초시문화원은 실향민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지난 2011년부터 ‘돈돌라리 복원사업’을 추진해 왔다. 함경남도의 부녀자들이 바닷가나 강변 또는 산에 모여 놀면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돈돌라리다.

 

원래는 춤과 노래가 합쳐진 지역의 가무곡인데 1950년대 이후 속초 아바이마을의 이주민요로 자리를 잡게 됐다. 속초 지역 실향민들의 망향의 한을 달래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현재는 실향민 1세대가 세상을 뜨면서 소리의 명맥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 남아있는 실향민들은 고향 문화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역행사 공연, 찾아가는 문화나눔봉사 활동 등을 펼치며 함경도 민요인 ‘돈돌라리’를 알리고 있다.

함경도 북청군에서 시작된 돈돌라리는 1950년대 속초 실향민들에 의해 지속돼 왔다.
함경도 북청군에서 시작된 돈돌라리는 1950년대 속초 실향민들에 의해 지속돼 왔다. 집에 있는 고무다라를 악기삼아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속초문화원 공연단 이재남 씨는 “지난 60여 년간 고향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리워하며 살아온 분들이 많다”며 “노래로 그리움을 달래다보니 삶에 문화가 녹아들더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 씨는 “함지박에 물을 부어 바가지를 엎어놓고 소리를 내면서 물박장단에 맞춰 민요를 부르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며 “지역 문화를 알리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 씨는 “이 춤을 추다보면 옛 함경도민의 삶과 애환 등에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많았다”며 “잊혀져가는 돈돌라리를 알리고 계승하는 데 앞으로도 한몸 바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민족의 얼과 정서를 누구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전통문화를 계승 재현하는 데 지금도 속초문화원과 공연단은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역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의 가슴 속의 한을 달래주고 있다.

 

출처:본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실에서 자료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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