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이래(有史以來) 처음 있는 사건’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쓰는 말 중의 하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이 눈앞에 실현되었을 때 무심코 이 말을 쓴다.

 

그렇다면 유사이래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역사가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라고 보면 될 것이지만 역사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계산하느냐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대체로 원시시대를 벗어난 시점을 가리키는데 현재로부터 6천여 년 전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수많은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역사의 기원은 더 뒤로 물러날 수도 있어 일반인으로서는 종잡기 힘들다. 그것은 문자를 통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족마다 필요에 따라 독특한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통해왔지만 상형문자를 발명하고 더욱 진전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문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자 이전에는 그림으로 의사를 표명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현존하는 울산 반구대 음각화는 수몰위기에 몰리면서도 끈질긴 보존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무튼 인류문명은 문자발명과 함께 급진적으로 발전을 이룬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보급을 수월하게 했고, 그로인한 발명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무기의 발달은 인류생존의 기초를 양성한다. 단순한 기구(器具)가 기계로 변모하고 무당의 주술에 의지하던 병 치료는 의학의 발달로 대체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약 100년의 과정은 약육강식에 의한 제국주의 영토 확장사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역사가의 손에 의해서 이러한 사건발생과 처리과정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으며 나라마다 고유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했다. 서양의 헤로도투스나 동양의 사마천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나라도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방대한 왕조실록이 생생한 역사를 전해준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한글을 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눌려 제대로 활용해보지 못하고 한자에 의지해왔으며 더구나 근세에 들어 일본의 강제합방으로 인하여 우리말과 글을 박탈당하는 참혹한 처지에 빠졌다.

 

약소국의 비애라고 하지만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한시도 멈추지 않았으며 강점 이전부터 민중들이 스스로 궐기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요즘 노블레스 오빌리지라는 사회지도층의 모범이 강조되고 있는데 목숨을 건 의병대는 대부분 양반계급이 주류를 이뤄 가장 혜택 받는 신분사회에서 도덕적 모범역할을 수행했다. 전성범(全聖範)의병장은 그런 의미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경남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주로 전라도 무주 적상산, 장수, 진안 등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양반출신 의병대장이다. 전성범은 을사늑약 이후 점점 옥죄어오는 일본의 침략을 저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 국민의 의병화 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일본군 병영에 불을 질러 혼비백산한 적군을 사살했다. 의병대를 지휘한 전성범의 신출귀몰한 전술전략은 평소에 독서를 통하여 많은 병서를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일본에 빌붙어 개인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친일모리배들을 붙잡아 군자금을 빼앗았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른다. 을사늑약에서 시작하여 강제합방에 이르기까지다. 일본군은 그를 잡기 위해서 현상금까지 걸었으며 그의 부인 하동정씨는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일본경찰의 전기고문을 받고 죽어야 했다. 강제합방 이후 일본군은 경찰력과 군대를 대폭 강화했으며 전성범은 1911년 1월 초에 체포되었다.

 

일제 총독부는 그를 전격적으로 재판에 회부하여 즉시 사형을 선고하고 항소하자마자 제대로 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5일 만에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시킨다. 붙잡힌 지 40여일 만에 1심과 2심을 끝낸 것이다. 2월18일 사형확정 후 4월5일 대구감영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이러한 기록은 풍비박살 난 가족들이 만주로 피신하여 광복된 후 돌아왔으나 배우지 못한 설움으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다만 면암 최익현선생처럼 항거단식으로 사망했다고 알았을 뿐이다.

 

필자는 그의 죄목이 살인 방화죄로 기록된 것을 보고 강제합방 직후의 불안한 사회분위기를 공포분위기로 바꾸기 위해서 ‘사형집행’을 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본란에서도 이 의견을 제시했으며 전대열, 전일환. 전상제 등 3인이 국가보훈처에 진상규명을 청원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드려 조선총독부관보(1911년4월14일)에서 사형집행 기록을 찾아내는 쾌거를 이뤘다. 쉽지 않은 기록을 104년 만에 찾아낸 국가보훈처의 독립 운동자에 대한 예우는 참으로 국가보훈 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상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깊이 감사드린다.

 

전성범과 함께 같은 날 사형집행이 된 옥천 임한영, 전북 고산 배춘성, 전주 김정오, 임실 이재화, 문경 장엄전 등의 죄목 역시 강도 살인 상해 등 모든 독립운동자들에게 적용되었던 죄목과 같기 때문에 일반 형사범이 아닌 독립운동 관련 인사인지도 모르며 전성범이 주로 전북을 무대로 무장투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출신지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국가보훈처의 조사 필요성을 건의한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