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항복했으나 일본은 태평양의 섬을 배경으로 두세 달 더 버티다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서야 무조건 항복했다.

 

미군도 가급적이면 가공할 새로운 폭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일본 본토상륙 작전에서의 미군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예상보다 위력적이었으며 일본의 완전 궤멸을 염려한 일본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택했다. 이 때 만주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은 미군과 협력하며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령하고 한국 진주를 목표로 대기상태였다.

 

그러나 때 이른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러시아가 종전 8일을 앞두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격적으로 만주일대에 진주하여 북한 땅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승전국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광복군 역시 이미 선전포고를 했지만 임시정부라는 약점이 있는데다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이를 꿰뚫어봤던 김구가 대성통곡으로 통탄한 이유를 알만하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쪽은 미군이 차지하여 두 갈래로 나뉜다. 군정을 거쳐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기 정부를 세웠으나 민족상잔의 6.25는 지금까지도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원수가 되어 60년 넘게 정전상태로 대치중이다.

 

그동안 남북정상회담도 가졌고 기본합의서도 교환했으나 근본적인 화해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DMZ 부근에서 북한제 목함지뢰가 터져 군인 두 사람이 크게 다쳤다.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은 광복 70년을 맞이하면서도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며 과거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담화로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끝내려한다.

 

“소금 사려!”라고 외치는 소금장수 뒤를 따라가면서 “나도”했다는 양반 우스개를 흉내 내는 것과 똑같은 아베의 과거형 사과는 전 세계 역사학자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에 대해서 박근혜대통령은 아쉬운 심정을 보였지만 침략과 사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관계개선에 대한 실마리를 남기고 있어 향후 조처가 주목된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영원히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우경화한 아베의 목을 비틀어 꿇어 엎드리게 할 방법도 없다. 외교는 실리를 중시한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의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선언할 때가 되었다.

 

일본의 요청이 아니라 한국이 선도하는 것이 주도권 행사에 가장 유리하다. 박근혜는 아베를 초청하여 그동안의 찜찜했던 문제를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두둑한 배짱과 외교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위안부에 매달려 더 큰 국가대사를 그르치면 안 된다.

 

때마침 대한민국 순국선열 숭모회(상임대표 전대열 상임공동대표 조대용 김선홍)에서는 광복 70년이 되었어도 누구 하나 찾아주는 이 없는 후손 없는 독립군 합동묘소를 찾았다.

 

해마다 추석과 설에 한자리에 모여 차례상을 올렸지만 이번 8.15는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연스럽게 모였다. 오의교 김종민 김종호 김삼규 손춘화 강영주 최창영 이숙경 등 늘 함께하는 동지들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욱 숙연하다. 서울 수유리 독립운동자 선열묘역에서 이시영선생 묘소 밑에 자리 잡은 이 묘소의 묘비는 ‘광복군 선열지묘’로 표기되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스럽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드시라 1967년 4월27일.”

 

김찬원 문학준 정상섭 김운백 김성률 안일남 전일묵 김유신 백정현 이해순 이한기 한휘 한성수 김순근 이도순 동방석 조대균 등 17위다. 이 분들은 1940년~1945년 사이에 산서성 능천, 태항산, 낙양, 내원, 일현, 산서성 고평, 서산, 천진, 서안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광복군에서는 그들의 뼈를 고이 간직했다가 해방된 조국에 모셔왔지만 후손을 찾을 길 없는 17위만을 국가보훈처가 이곳에 모신 것이다. 묘소에는 국가보훈처장의 화환 하나만 덩그러니 외롭게 서있다. 우리는 추모현수막을 걸고 막걸리로 헌주하며 외로운 넋을 위로하는 추모식을 거행했다.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고 고귀한 생명마저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꺼이 바친다는 것은 민족정기의 발로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본과 싸우다 순국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 17위의 충혼이 서려 있는 곳.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님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귀감으로 전하고자 1985년 광복 40년을 기하여 이곳을 단장하게 되었다”는 국가보훈처장 명의의 묘역정리 사업의 연혁비문은 나름대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후손 없는 독립군’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빠진 점이 못내 아쉽다.

 

국가보훈처는 광복군 합동묘소의 주위를 확장하여 선열묘역으로서의 위용은 갖춰야 하며 학계에도 널리 알려 무후 독립군의 전적발굴에도 일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선열들을 찾는 발걸음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