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과 어두움, 혹은 비어있음과 채워있음/ 이도우화백
천년의 도시 경주에서!!
서양(西洋) 누드화(nude畵)의 동양적(東洋的) 만남.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인 백로(白露) 인 지난8일
국내 누드화의 중진 향토 서양화가인 이 도우 화백의 화실을 찾았다가,
말로만 듣던 누드화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그날의 느낌과 문화적 신선한 충격은 미술문외한(門外漢)인 기자의 눈에도 아름답다는
마음과 경이로움이 저절로 일었다.
이도우 화백의 작품을 접한 영화평론가의 글을 통해 본격적인 누드(nude畵)의
신세계를 함께 해보자.
이도우 화백 누드화 도록에 기록된 전찬일(영화 평론가) 의 글을 옮겨 모셔 봅니다.
밝음과 어두움, 혹은 비어있음과 채워있음…그 사이에서
누드화는커녕 미술 자체에 대해 문외한인 한 영화 평론가가, 한 누드 전문화가의 전시회 도록에 실릴 평문을 쓰기로 한다? 무모할 뿐 아니라 일종의 센세이셔널리즘이기 십상이다. 명색이 ‘가’家의 길을 제법 오래 걸어온 두 사람이 그 위험함을 모를 리 없을 터. 그렇다면 그 둘에게 그 위험을 감수케 한 동인은 과연 무엇일까. 짐작 가는 바 없진 않으나, 이 짧은 지면에 저쪽의 의중을 담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저 간략히 이쪽 속내를 피력할 수밖에.
결정적 계기는 4쪽짜리 팸플릿에 실린 한 장의 작은 그림에서 비롯된다. 2009년 8월 14일부터 한 달 반여 동안, 갤러리BK에서 열린 이도우 누드 솔로 전시회 ‘여.여’女.如에서 선보였던 한 여성의 흑백 나체화(53.5cm×33.4cm)다.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풍만한 가슴이 유난히 희고 탐스럽다. 그 아래, 잘려나가 부분적으로 담긴 활짝 벌린 양 다리 사이의 거웃은 검고도 수북해, 그 역시 탐스럽기 그지없다…….
40여 년간의 영화보기로 영화적 관음증에 젖을 대로 젖은 내 시선을 치명적으로 사로잡은 것은 그러나, 위 가슴이나 그 가슴을 머금고 있는 살들도, 또 그 자극적 거웃이나 그 거웃을 에워싼, 벌린 다리들도 아니다. 여인의 얼굴…가슴께의 밝음과 다리께의 어두움을 동시에 머금고 있으며, 편할 대로 편한 자세로 오른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무심하면서도 입체적인 표정!
거기에는 어떤 순간이 배어 있다. 아마추어 모델임이 분명한, 그래 낯선 남자 앞에서 적잖이 부끄러워했을 젊은 여인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찰나’가 담겨 있다. 회화, 사진, 영화 등 온갖 조형 예술의 최종 목표가 다름 아닌 그 찰나를 포착·표출하는 것이라 할 때, 그 그림은 내게 이도우 미술 세계의, 더 나아가 예술 세계 일반의 궁극으로 다가섰다. 그가 인정하든 말든 아랑곳없이.
지인을 통해 화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더욱이 화가의 이름과 그림을 난생 처음 접한 내 입에서, 세상에 어떻게 이런 표정을…따위의 값싸지만 진심 어린 감상·감탄이, 마치 신음처럼 터져 나왔던 건 그래서였다. 안다. 내 감상이 얼마나 영화적인가를. 영화적 시선에 함몰된, 일방적·폭력적이며, 어쩌면 무지한 해석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문제의 그림을 보며, 자동적으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등을 떠올렸던 것도 실은 영화 평론가란 내 정체성과 무관하진 않았으리라. 그 문제작에서 내가 가장 열광했던 장면은, 영화 후반에 두세 차례 나오는 이병헌 캐릭터 선우의 클로즈 업, 즉 표정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그림(의 표정)은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누드화에 대한 내 시선·인식을 전격 재환기·구체화시키기 충분했다. 일찍이 거장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영화 <패션쇼>에서 역설했듯, 나체는 의상의 한 유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드화는 고대 이래 미술의 주요 분야로 지속돼 왔다는 사실 등을 새삼 환기시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또한 내게, 영화와 미술 사이의 상관성을 새삼 절감시켜주기도 했다. 그 동안 주로 구도Composition로써 영화와 미술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해왔는바, 표정이 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으뜸 요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주었다고 할까.
단초는 또 다른 단초들을 낳는 법, 그 그림의 표정을 통해 팸플릿 속 다른 세 장의 그림들을 보니 그들 역시 그 못잖은 감흥을 선사하는 게 아닌가. 얼굴이 잘려나간 세 여인의 몸들(女.如 145.5cm×89.4cm)에서도 제 각각의 표정들이 엿보인다. 화려한 색체의, 세로로 길게 누운 여인(女.如 162.2cm×130.3cm)의 표정도 여간 입체적이질 않다. 뱃살이 부끄러워서일까, 무릎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은 여인(女.如 72.7cm×53.0cm)의 사연 가득한 표정도 눈앞에 삼삼하다. 결국 이도우, 그의 그림들은 밝음과 어두움, 혹은 비어있음과 채워있음…그 사이에 위치한 채, 그 사이를 드러내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의미심장한 몸부림들 아닐까, 싶다.
2010년의 솔로 전시회 ‘쉼’을 장식하는 열다섯 점의 그림들도 그 사이를 서성인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명과 암 사이를, 결여와 충만 사이를, 그리고 수많은 ‘사이들’을. 인연 맺은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았고, 직접 만나 술잔을 기울인 게 몇 차례 되지 않아도, 사실 이도우라는 인간 자체가 사이적이다. 그만큼 인간적 균형감이 돋보인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확신·존중…을 견지하면서도 매 순간 타인은 물론 주변 환경을 향한 예의·배려에도 세심하다. 이도우 화백의 그런 성숙한 인간적 덕목이 아니라면, 내 아무리 그의 그림들에 감동했을지언정, 도록 글을 써달라는 그의 용단 섞인 제안에 끝내 응하지 않았으리라.
고백컨대 이화백만큼 매혹의 향기 물씬 풍기는 인간을 만나기란 흔치 않다. 그와의 대화·술자리만큼 자발적이면서도 유쾌한 자리를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유유상종, 이라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은 경주에서 처음 만난 그의 오랜 벗도 그와 닮은꼴이었다.
어느 감독이 그랬다. 영화는 태도라고. 미술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을 듯. 결국 미술 문외한인 영화 평론가에게 생애의 발견을 가능케 하고, 이처럼 무모한 시도를 감행케 도발한 이도우의 그 그림은, 아울러 그의 숱한 그림들은 그의 사이적 태도에서 태어난 셈이다.
동년배이면서도 선배 같고 형님 같은 인간 이도우와의 짧되 굵은 인연에 깊은 감사를, 수묵으로 구현한 모노톤적 화풍으로도 그 어떤 색채의 화려함을 압도하며, 동양화의 겸양·감춤과 서양화의 자신감·드러냄을 공생시킬 줄 아는 화백 이도우의 그림들에 크디 큰 존경과 사랑, 갈채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