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질 땐 순식간이지만 올리기는 너무나 어려운 가혹한 개인 신용평가시스템이 양극화를 심화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9일 금융당국과 금융권에 따르면 개인 '신용등급'이 급등락하거나 신용평가사별로 다르게 산정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면서 개인 신용평가사(CB)들의 '고무줄 신용등급 산정 시스템'을 개선해야 중산층 복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신용등급이 예기치 않게 급락하면서 고금리에 허덕이거나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업계 안팎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밀한 신용등급 평가가 이뤄지려면 신용평가사별로 상이한 평가모델을 정교하게 개선하는 한편 신용평가사들이 더욱 많은 개인의 신용거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내 신용등급 '롤러코스터'…맘대로 평가기준이 화근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모(39)씨는 2억5천만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연체 없이 상환하고 있지만 최근 2개월간 카드대금을 연체하자 3등급이던 신용등급이 7등급으로 떨어졌다. 신용등급이 7~10등급인 사람은 저신용자로 분류돼 은행에서 대출 등을 받기가 쉽지 않다.
정씨는 "대출을 갚으면서 생활하기가 빠듯해 급한 마음에 신용카드 서비스를 이용했지만, 2개월 연체했다고 신용등급이 4단계나 떨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패션디자인관련 회사에서 근무하는 김모(31)씨는 신용카드로 매달 100만~200만원 정도를 사용하고 연체 없이 갚아나가고 있다. 그런데 개인 신용등급이 A신용평가사에서는 1등급으로 평가됐지만 B신용평가사에서는 5등급으로 무려 4등급이 차이가 났다.

   이외에도 주택이 아닌 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신용등급이 2등급에서 5등급으로 추락하거나 쓰지도 않는 휴면카드만 해지했을 뿐인데 신용등급이 3단계나 내려가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또 금융기관 등을 통해 자신의 대출한도를 조회한 사실만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관행은 오래전부터 문제로 지적돼왔다.

   이처럼 개인의 신용등급이 급변하거나 평가사마다 다른 것은 신용평가사들의 개인 신용등급 평가모델과 활용 정보들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개인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곳은 한국신용정보(한신정·NICE), 한국신용정보평가(한신정평가·KIS), 코리아크레딧뷰로(KCB) 등 세 곳이다.

   이들은 각 금융회사와 은행연합회 등으로부터 대출, 연체, 조회기록 등의 정보를 받아 신용등급 평가에 활용한다. 그러나 3개사가 사용하는 신용등급 평가모델들과 활용 정보가 서로 달라, 똑같은 사람의 신용등급도 기관별로 차이가 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개인 신용등급 산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신용평가사 간 보유 정보의 양에 차이가 나는데다 불량정보 위주로 평가가 이뤄지는 관행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례로 한신정과 한신정평가는 장기 연체와 대출, 보증 등의 기록을 주요 정보로 활용하고 있지만 개인의 카드 사용 실적은 정보로 활용하지 못했다. 반면 코리아크레딧뷰로는 카드회사로부터 카드 사용 실적을 받아 신용등급 평가 때 반영해오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매길 때 활용하는 정보 중에는 불량정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세금 체납, 연체 같은 정보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는 불량정보라면 꾸준한 이자상환, 카드 성실납부, 고소득 등은 신용도를 올리는 자료로 활용되는 우량정보다.

   그러나 한 신용정보사의 경우 평가 항목에서 연체와 채무 정보의 비중이 전체의 70%에 이르며 개인의 소득은 반영하지 않는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신용등급 평가모델별로도 항목별 비중이 다르고 활용 정보 중에 신용등급 하락에 영향을 미치는 불량정보가 우량한 것보다 훨씬 많다"며 "신용등급 평가 때 소득은 고려하지 않고 신용거래에 관한 정보만 반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평가사 관계자는 "할부 등의 카드거래내역은 평가에 유용한 정보이지만, 대다수 카드사들이 카드 거래 실적을 공개하지 않아 평가에 반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정교한 평가모델 마련·정보공유 확대해야
문제는 신용등급 추락이 고금리 부담, 나아가 제도 금융권 퇴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잘못된 신용등급으로 신용거래 피해자가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신용평가사 간 정보 공유 기반을 확대하고 현재 다양한 평가모델을 보다 정밀하게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작년 10월 신용평가법이 시행되면서 신용평가사들이 국민연금, 전기요금, 각종 세금 및 공공요금 납부실적과 같은 우량정보를 담당 기관으로부터 받을 근거가 마련됐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아직 평가에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않다. 공공기관이 정보 공개를 꺼리고 있는 탓이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영업비밀이거나 민원의 소지가 있다며 정보 공개를 꺼리고 있다"며 "이런 식으로 정보가 왜곡되다 보니 신용평가가 맞을 때도 있고 안 맞을 때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공요금 성실 납부 실적 등의 우량 정보가 신용등급 평가에 반영되면 저소득층은 신용등급이 올라가 보다 많은 금융거래를 할 길이 열린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개인 신용등급은 증명하기 어려워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 쉽지 않다"며 "정밀한 신용등급 평가가 이뤄지도록 평가모델 등을 고쳐 신용거래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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