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스포츠 대전인 올림픽은 4년마다 한 번씩 개최된다.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으로 나뉘어 열리기 때문에 사실상 세계올림픽은 2년에 한 차례씩 펼쳐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축구경기를 마무리하는 월드컵경기도 그 터울이 4년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모두 한국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자존심과 긍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경기를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서 엄청난 뇌물을 썼다는 후일담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통에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최근 피파회장 불라터의 추문이 수사대상에 떠오르면서 가장 신성해야 할 축구의 구심점에 흠집이 생기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스포츠 말고도 세계 각국에서는 영화제를 비롯한 온갖 문화행사들이 줄을 잇는다. 브라질의 삼바축제는 세계인들이 즐기는 광란의 춤이 뒤따른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역별로 엄청나게 많은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어 국민들을 즐겁게 한다. 함평의 나비축제, 부안곰소의 젓갈축제, 홍천의 연어축제, 영덕의 대게축제 등등 나름대로 지역특산물을 중심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 영화제를 개최하는 지역도 수없이 많아 부산, 전주, 광주, 부천 등이 경쟁적으로 국제영화제를 해마다 여는데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내실은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지역의 특색을 살리며 문화도시로서의 긍지를 한껏 높이는 행사를 주관해온 전북 전주에서 열 번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열리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서예는 붓글씨다. 벼루에 물을 가득 붓고 큼직한 먹을 갈아 시커먼 먹물을 만들어 붓에 묻힌 다음 하얀 종이에 마음먹은 글씨를 쓰는 일이다.

 

누구나 한 번씩은 해봤음직한 학교에서의 습자교습이다. 다만 글씨가 잘 써졌는지 여부는 본인이 판단하더라도 금세 안다. 반듯하게 쓰려고 했는데 붓은 제 맘대로 돌아간다. 아무리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붓을 제어할 수 있는 경지가 되려면 세월이 흘러야 한다.

 

붓글씨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잘 쓸 수밖에 없겠지만 오랜 세월 갈고닦으면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손재주만으로 달필이나 명필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서예를 하는 나라는 한문권을 중심으로 번졌기 때문에 한국, 중국, 일본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서예(書藝),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부른다던가. 서예로 쓰는 글자는 대부분 한문(漢文)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옛날부터 한글로 붓글씨를 쓰는 전문가들이 상당수다. 아름다운 한글 꼴이 쓰는 이의 생각과 철학에 맞춰 이렇게도 써지고 저렇게도 삐쳐진다. 유명한 디자이너는 한글서예로 디자인한 옷감을 만들어 프랑스 파리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요즘에는 서양인 중에서도 서예를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 많다. 영어 알파벳을 붓글씨로 쓰는데 아직 개척단계이긴 하지만, 앞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알아보기 힘든 아랍문자로도 서예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서예는 단순히 글씨만 쓰는 게 아니라 사람의 혼을 담은 마음을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는 그 역사가 벌써 22년이 되었다.

 

인생으로 치면 성년이 된 것이다. 2년마다 한 차례씩 쌍년제(雙年制)로 열리지만 그동안 그랑프리 대상을 받은 인사들은 문자 그대로 글로벌하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가 나왔고 한국과 일본이 뒤를 이었다. 금년에는 홍콩출신의 작가가 그랑프리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것은 당연히 ‘전라북도’지만 실질적으로 주관하고 후원하는 개인이나 기업이 없어서는 이뤄지기 어렵다. 전북 부안출신의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이 이를 전담했다. 그는 대회 조직위원장으로서 이 고장 출신으로 서예의 대가인 창암 이삼만, 석전 황욱, 강암 송성용선생의 서풍(書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음식으로 유명한 전주(全州)에서는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 식당에 들어가도 멋지게 휘갈긴 붓글씨나 한국화 한 폭쯤 구경하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다.

 

도시 전체가 묵향 가득한 서화로 가득 차있고 육자배기 판소리로 이어지는 창의 고장으로서 수백년 내려오는 ‘소리의 대전’이 열리기도 하는 고장이다. 서예비엔날레 역시 덕진 소리의 전당에서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누구나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멀기만 한 예술이지만 국제적인 행사로 성장한 서예비엔날레는 앞으로도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갈 터전을 이번 대회에서 확고히 한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일진그룹이 튼튼하게 뒷바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서다.

 

허진규회장도 작품을 냈다. 형단영기곡(形端影豈曲). 형체가 반듯한데 어찌 그림자가 구부러질 수 있겠느냐 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올바른 일은 변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평소의 신념과 어우러진다. 서예비엔날레는 화려한 행사는 아니다. 매스컴의 각광을 받는 화려한 배우도 없고, 스포츠 스타플레이어도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인물들이 적잖게 참여했다.

 

모로코대사는 축사까지 했으며 명사초대전에 출품한 정종섭 행자부장관, 김종덕 문화부장관, 중앙일보 홍석현회장, 이낙연 전남지사 등이 자리를 빛냈다. 송하진 전북지사는 작품을 통하여 강암선생의 대를 이은 서예가로서의 실력을 뽐냈다. 금년도 서예비엔날레의 특징은 21세기 인문학을 선도하는 입장에서 5개 부문과 23개 프로그램을 준비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행사는 가장 중요한 개막식을 전주가 자랑하는 예술의 종합전시장인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열었지만 10월 17일부터 11월15일까지 무려 한 달 동안 전북예술회관과 한벽루 등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혼이 깃들어 있는 곳에서 문호를 활짝 개방하여 열린다는 사실이다. 한벽루는 전주한옥마을과 연대하여 더욱 뜻 깊은 행사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예비엔날레는 붓과 먹이 있는 한 멈추지 않고 전주천의 흐름과 함께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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