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傳記)이자 역사서요 교양서 -


일본이 탈취해 간 고종 황제 내탕금의 전모를 최초로 밝힌다.

헐버트(Homer B. Hulbert)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문 역사가들마도 헐버트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은 조선의 개화 물결 속에서, 그리고 구한말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미국인 헐버트(1863-1949)의 일생을 다룬 일대기이자 역사서이며, 교양서이다.

이 책은 또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파헤쳤다. 새로운 한·일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본이 탈취해 간 고종 황제 내탕금의 전모를 실체적 증거와 함께 최초로 밝혔으며, 헐버트가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상원에 진술서를 제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대한독립을 호소하였음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입수하여 공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발행일인 1896년 4월 7일의 요일이 잘못됐음도 밝혔으며, 띄어쓰기가 《독립신문》 이전부터 시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헐버트는,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4일 조선 땅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문명화와 주권 수호를 위해 크게 헌신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9년 광복절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환국한 지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했다. 그는 생전에 《AP 통신》 기자에게 말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소원대로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 서거 다음 해인 1950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다.

지은이는, 한국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명화와 독립운동에 큰 획을 그은 헐버트를 우리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한다면서 120년 전의 《뉴욕 타임스》 기사 등 헐버트 관련 자료를 십수 년에 걸쳐 파헤쳐 그의 일생을 폭넓고 세세하게 이 책에 담았다. 아울러 이 책은 조선의 개화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구한말에 어떻게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는가를 물 흐르듯 쉽게 설명하였다.

지은이는 헐버트의 삶을 통해 국민들에게 나라의 소중함과 올바른 가치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헐버트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이 지성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학문 탐구의 열정과 정의를 좇는 기개를 배우기를 희망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을 기억함으로써 한민족이 보은을 아는 문화 민족으로 국제적으로 인식되고 또한 이 땅에서 더욱 많은 열린 세계인이 배출되어 지구촌 전체의 번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더욱 성숙한 세계인이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이 책에서 밝힌 헐버트의 주요 업적과 한국의 문명화와 한국학 개척에 기여

-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교육자

헐버트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교육을 조선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 한성사범학교 교장,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과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등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주권을 빼앗기자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것을 호소했다. 헐버트는 또 학교교육을 넘어 모든 백성이 골고루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국민교육을 주창하였다. 그는 1903년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서 YMCA 탄생의 주역이었다.

- 한글학자이자 한글 사랑의 표상

헐버트는 1889년 지리, 사회 총서인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여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썼다. 그는 한글을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라고 정의하였으며, 또한 조선인들에게 어려운 한자 대신 쓰기 쉬운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필두로 한글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보았다. 그는 또 1세기 훨씬 전부터 국제적인 신문 및 학술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였다.

 - 민족 혼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

헐버트는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채보(採譜)하여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아리랑이 오늘날 세계의 노래가 되는 단초를 열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라며 아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했다. 아울러 그는 군밤타령도 오선지에 채보하여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 음악사에 양악보 시대를 가져오면서, 전래 민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선교사

 헐버트는 1893년 감리교 선교사가 되면서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를 책임 맡았다. 그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노량진교회의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아펜젤러, 언더우드를 도와 우리나라 개신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887년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행하였다.

-《독립신문》의 숨은 산파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서재필을 크게 도왔다. 서재필은 삼문출판사의 인쇄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독립신문》을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탄생시킬 수 있었다. 헐버트는 편집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독립신문》 영문판은 헐버트가 편집인이나 다름없었다.

 이 책은 《독립신문》 창간호의 한글판에 찍힌 금요일이라는 요일이 틀렸음을 최초로 밝히고 있다. 1896년 4월 7일은 화요일이었다.

 헐버트는 이외에도 1892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의 공동 편집인이었고, 항일 투쟁의 선봉지였던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1901년 직접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 불세출의 역사학자

 헐버트는 15년에 걸친 한민족 탐구를 거쳐 1905년 800쪽이 넘는 360,000개의 단어로 쓰인 초대형 역사책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전통, 풍습, 산업, 사회제도 등 한국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1906년 출판하여 국제적으로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한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여 국제적으로 알린 최초의 인물이며,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는 헐버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 한민족의 우호적 기질과 성공잠재력을 발견

 헐버트는 ‘한민족은 중국인들처럼 상술에 능하지도 못하며, 일본인들처럼 무사적인 기질을 가진 민족도 아니다. 오히려 앵글로·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사는 민족 중에서 가장 우호적인 민족이다.’라고 한민족의 기질을 정의하였다. 그는 한민족을, 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뛰어나고, 두뇌가 우수한 성공잠재력이 큰 민족으로 평가하였다. 헐버트는 한민족이 금속활자, 거북선 등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다며 이러한 한국의 발명품들을 100년 전에 국제적으로 소개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헐버트는 언더우드 등과 함께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이 책은 1895년 11월 27일 춘생문 사건 당일 헐버트 일행이 고종을 보호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을사늑약 저지를 위한 고종 황제의 대미 특사

고종 황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미국의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헐버트를 임명하였다. 헐버트는 1905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조야에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이 일본의 보호 통치 음모를 저지시켜 줄 것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막아달라고 호소하였다. 이 책은 헐버트의 미국에서의 활동을 우리나라 최초로 세세하게 밝혔으며, 당시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 일본의 횡포에 맞서는 헐버트

 헐버트는 러·일 전쟁 직후 박해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일본에 대항하였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부동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헐버트에게 부동산 등기문서를 들고 와 헐버트 명의로 이전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헐버트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한국인들에게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면 자신은 일본 비난을 중지하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이 우리나라 국보인 개성 부근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을 고종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탈취해가자 헐버트는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 국제적 신문에 고발하며 석탑 반환을 촉구하였다. 후일 석탑은 돌아왔으며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고종 황제는 1907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하기 전 1906년 헐버트를 조약 상대국 국가원수를 방문하는 특사로 임명하였다. 헐버트는 조약상대국 국가원수들을 만나고 한국 특사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 그는 헤이그에서 한국인 특사들을 도왔으며, 1907년 7월 10일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한국인 특사를 지원하는 연설까지 했다. 이 책은 헐버트의 만국평화회의와 관련한 헤이그 및 유럽에서의 활동을 소상히 밝혔다.

-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

 헐버트는 1907년 여름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면서 한국인들을 격려하고,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면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이어갔다. 이 책은 헐버트가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미국 상원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음을 최초로 밝히고 있다. 헐버트는 이 진술서를 위해 공증까지 하였다. 지은이는 이에 대한 자료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하여 이 책에서 사진과 함께 제시했다.

일제가 탈취해 간 고종 황제 내탕금을 돌려받아 고종 황제의 100년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이 책은 1903년 고종 황제가 상하이에 있는 덕화은행(독일계 은행)에 독일화 510,000마르크를 금괴와 일본 엔 화로 예치하였으며 이 돈을 1908년 일본이 탈취해갔음을 우리나라 최초로 밝혔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의 총세입의 1.5%나 되는 돈이다. 오늘날의 가치는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약 2조원이 된다. 국제금융인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덕화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 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실체적 증거를 제시하며 내탕금의 예치 과정,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하는 경위, 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하는 과정, 헐버트의 내탕금을 찾으려는 분투,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접하고 취한 행동 등을 소상하게 밝혔다. 40년 동안 이 돈을 찾으려고 동서분주한 헐버트는 생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이자까지 합쳐서 꼭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지은이는 CEO 출신답게 증거 자료와 함께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파헤쳐 내탕금 문제의 모든 의문점을 해소하였다. 지은이는 내탕금에 대한 근거 없는 여러 설을 일축하며 이 문제를 흥밋거리로 보아서는 아니 되며, 민족정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이기도 한 지은이는 이 문제는 새로운 한·일 문제로서 헐버트가 소원한대로 이자까지 합쳐서 돌려받아야 하며 경술국치 백년을 맞아 고종황제와 헐버트의 100년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이 문제에 대해 김영일 광복회장과 김삼열 (사)독립유공자유족회장과 협의하였으며 두 분은 일본이 탈취해 간 내탕금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소송을 해서라도 기필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은이가 강조한, 우리가 이어가야 할 헐버트 정신

- 올바른 나라 사랑

 헐버트는 요란스러운 애국보다는 내면으로부터 발산하는 올바른 애국심(right patriotism)을 강조하였다. 지은이는 국가와 국민은 불가분의 공동운명체라면서 나라사랑이 결코 진부한 단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지은이는 모든 국민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기초 질서를 잘 지키며, 특히 국외에서 나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등 자그마한 애국부터 실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한 헐버트는 매사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는 ‘편법은 원칙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좌우명과 함께 언제나 일관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일관된 가치관 속에서 그는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며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지은이는 국민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여 우리 사회가 이기적 편리함보다 원칙에 충실한 삶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교육 정신

 헐버트는 교육만이 나라를 지키고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은이는 교육이 그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며, 헐버트의 교육입국 정신을 받들어 우리 교육 기관에서 창의적 지성인을 양성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 박애주의 정신

 헐버트는 전인교육과 투철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평등과 박애주의 정신의 실천가였다. 지은이는 헐버트의 박애주의 정신을 받들어 우리 사회도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 책과 관련한 특기 사항

- 지은이는 사실에 입각하여 객관적 견해로 이 책을 썼다. 지은이는 십수 년에 걸쳐서 헐버트의 모교인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을 직접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였고, 후손을 추적하여 그들로부터 헐버트에 관한 자료를 발굴하였다. 아울러 국제적 신문들의 100년 전 기사들을 추적하여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이 책을 썼다.

- 한글맞춤법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랐으며, 외래어의 우리말 표기도 국립국어원이 제정한 ‘외래어표기법’에 따랐다. 이 책은 가급적 외래어를 쓰지 않았으며, 한자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썼다. 단어 선택도 신중을 기해 가급적 한자 유래어를 지양하고 국립국어원에서 권장하고 있는 쉬운 우리말을 택했다.

역사적 문서의 번역도 가급적 현대적 문체로 하였으며, 외국에 보내진 고종 황제 친서 등은 영문본을 바탕으로 현대적 문체로 의역하였다.

각종 영문의 번역은 국제 금융기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지은이가 원문을 훼손하지 않으며 알기 쉽게 의역하였다.

-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에는 검증된 역사서와 대조하여 올바른 역사를 기술하였다. 사건의 날짜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양력을 기준하였으며 우리나라가 태양력을 쓰기 시작한 1896년 전의 날짜도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서 기술하였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통해 풍부한 상식을 제공하였다. 각주도 출처 표시와 이해를 돕는 내용의 표시를 달리하였다.

 지은이는 사실에 입각한 역사 기록을 쓰면서도 가급적 재미있게 내용을 구성하여 독자들이 딱딱한 역사서의 느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지은이 소개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지은이는 대학 시절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읽고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열정적 삶에 감화 되어 수십 년에 걸쳐 헐버트를 연구해왔다. 지은이는 국제금융계에서 크게 활약하면서도 헐버트 정신을 우리 민족이 꼭 이어가야 하며 특히 헐버트의 삶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의 삶이라는 확신 속에서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발기한 이래 헐버트 후손을 초청하는 등 헐버트 기념사업에 정진하고 있다.

지은이는 헐버트를 연구하면서 특히 구한말 역사에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어 각종 학술대회에서 헐버트와 구한말에 관한 발표회를 수차례 가졌으며, 학교, 교육청,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등에서 특강도 해왔다. 2007년에는 헐버트 및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 정부 기밀문서를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확보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 정부 기밀문서 자료집>을 출간하였다.

 지은이는 1978년 미국의 케미칼은행(Chemical Bank)을 필두로 국제 금융기관에서 30여 년간 근무하였다. 체이스맨해튼은행(Chase Manhattan Bank) 한국 대표, 제이피모간체이스은행(JPMorgan Chase Bank) 한국 회장, PCA투신운용(주) 대표이사 등을 지내는 등 국제금융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는 국제 채권단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2003년 외자 유치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현재 유리치투자자문(주) 회장이며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겸임 교수 이다. 아울러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평 :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한철호 교수

저자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섭렵으로 헐버트 박사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헐버트 박사의 구구절절한 한국 사랑과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종 황제 내탕금의 진실을 파헤친 역서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꼭 읽어야 할 구한말의 대서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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