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장섭 기자의 말말말] 칼국수’대통령, 金泳三..편히 잠드소서


한국정치의 거목(巨木)이자 한시대를 호령하던 金泳三 前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벽 향년 88세의 일기(日記)로 세상을 떠났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3金 정치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있던 故人을 우리는 준비도 없이 그렇게 보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며 군부와 맞섰던 金泳三 前 대통령은 꺾이지 않는 집념과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시대의 산 증인이다. 故 김영삼의 정치철학이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며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32년만에 그토록 갈망하던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비록 대통령이 되기전, 야당에서 활동하였지만 그의 노선은 분명 보수주의의 성향이었다.

 

자유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던 대쪽 정치인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기자>가 바라본 故人은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으며 존경하는 인물로 정치가 조병옥과 존 F. 케네디를 지목했던 그런 정치인 이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이시대  "마지막 남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큰 산이었으며 존경의 대상이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렇게 우리들의 곁을 조용히 떠났다.

 

故 김영삼의 인생과 정치 역정은 모두 우리 현대사와 함께했다. 故人은 일제의 식민 지배 시기에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어머니를 간첩의 총탄에 잃어야하는 슬픔을 맞보기도 했다. 정치에 투신한 뒤에도 꺾이지 않는 집념과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故人의 죽음은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두 중심축이자, 한국 정치를 30년 가까이 주도한 양김(兩金)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양김(兩金)의 퇴장을 알렸다. 그러나 두 거목(巨木) 정치인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크고도 깊다는 사실을 역사가 이제 두고두고 증명해 줄 것이다.

 

동료였지만 한때 정적(政敵)이기도 했고, 말년엔 서로 의지했던 김종필 전 총리는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故人을 추모했다. 이희호 여사도 고인을 가리켜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치켜 세웠다.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산증인으로 최연소(26세) 의원이라는 이력과 최다선(9선) 의원이란 기록을 갖고 있는 故人은  자신의 정치 인생 전반기에 권위주의에 눌려 비틀거렸고 신음도 했다.

 

당시 아무것도 가진것 없었던 대한민국은 건설과 산업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며 권위주의를 앞세웠다. 권위주의는 결국 1963년 군정 연장의 명분을 만들었고 이에 격분한 故人은 일관되게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투쟁 중엔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79년엔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했다.

 

초산 테러는 부산·마산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되어 유신 정권의 종말을 이끌어 냈다. 1983년, 故人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고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6·29 선언을 통해 국민 직전제를 도입했다.

 

故人은 민주화 투쟁의 기나긴 여정에서 한 번도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작금(昨今)의 후배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 투쟁했지만 출구 없는 대결이 아니라 절충과 타협으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는 정치 9단의 면모를 보였다.

 

점진적 개혁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군인 정권의 중심이었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야당 진영에 함께 몸담았던 이들로부터 비난도 받았지만 누가 뭐래도 3당 합당은 군정(軍政) 종식과 '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체육관 밀실 정치의 종말은  6·29 선언을 이끌어낸 故人의 정치인생의 최대 걸작이다.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이자 오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완결편으로 이끌었고 종지부를 찍었다.

 

故人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무성 여당 대표,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 손학규 전 야당 대표 등 대한민국 정치거물 상당수가 김 전 대통령 아래에서 정치를 배우고 시작했다.

 

우연이었을까?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11월 22일은 그의 재임 중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바로 그날이기도 하다. 故人은 대통령 취임 후 금리를 자유화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관치(官治) 경제 시대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필연의 몸부림이었다.

 

故人은 재임 초기에 '세계화'를 선언하고 1996년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국제수지 적자가 8년 연속 계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규제 완화와 금융시장 개방은 큰 부작용을 낳으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졌고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외화 차입은 결국 경제 전반에 직격탄이 되고 말았다.이런 이유로 故人은 지금까지 IMF 구제금융의 주범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를 후퇴시킨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사건은 김 전 대통령 정치 인생에 가장 큰 오점이 됐고 본인도 마지막까지 이 일을 괴로워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故人이 주도한 세계화, 민간 자율과 개방 위주 경제정책은 결국 우리 사회와 경제가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있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먹구름이 몰려오는 일촉직발의 위기에 몰려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풍요속의 빈곤이 현실로 들어나는 이시기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고있는 경제와 여야의 지칠줄모르는 상처내기는 우리 정치의 무기력증을 국민들에게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 어쩌랴..대한민국의 좌표를 더욱더 걱정하게 만드는 오늘이다. 하지만 故人이 현역시절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개혁가이자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우리모두가 저물어가는 2015년의 11월에 긍정적 유산으로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칼국수’대통령으로 개혁에 앞장섰던 故人을 국민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2015년 11월 22일 새벽...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가 있어 치료를 받던 故人은 대한민국을 사랑했지만 그렇게 말없이 세상을 떠났다.

 

총과 워카발 아래서 직선제를 당당히 이끌어냈던 대통령이 바로 당신이십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투표로 당신을 뽑았고 민선 대통령 김영삼을 만들었습니다..이제 당신은 이세상에 없지만 당신을 사랑합니다.그리고 이젠 편히 잠드소서


/중앙뉴스/윤장섭 기자 news@ej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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