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國富論)이라는 경제학술서가 출간된 것은 1776년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적인 시점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영국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애덤 스미스다. 그의 고향은 자유주의 기풍이 매우 강한 곳이어서 국부론 역시 이에 근거하여 봉건제와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그의 저서가 세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지금까지도 모든 경제학설에 발상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주의적 중상주의(重商主義) 이론과 간섭주의적 정책체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 사람의 저서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할 정도로 대저작물이 된 것은 그만큼 탁월한 경제이론을 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애덤 스미스는 생전에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등 세 개의 혁명을 체험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혁명들은 독재와 식민지정책을 까부수고, 봉건왕조의 수탈과 인권유린을 뒤집은 것이었으며, 대량생산과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지긋지긋한 기득권 세력에게 찬물을 끼얹은 이 혁명들은 그 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며 독립운동, 인권옹호, 경제부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보여주는 긍정적 측면과는 달리 요즘 극우진영에서 펼치고 있는 국부론(國父論)은 문자 그대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장본(張本)이 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을 거론한다면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겠지만 하필이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국민의 저항으로 정권에서 쫓겨난 인물을 내세우고 있으니 어찌 평지풍파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가 비록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광복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이라고 할지언정 최후의 순간 국민을 배반하고 추방을 당했다면 아무리 존경하고 싶어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정상적인 인격과 사고를 가졌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며 떠받드는 인물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의 젊은 시절은 봉건왕조에 대한 저항이었다.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을 계몽하려고 했으며 침략주의 세력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다짐했다. 그로 인하여 구 조선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장기간 투옥되기에 이른다. 석방된 후 그는 미국유학 길에 오르며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개인적인 출세의 발판을 구축한다.

 

교포 사이에 명성을 얻은 그는 많은 후원자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과 조직을 지원 받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다른 조직과의 마찰을 빚으며 교민사회의 분열을 자초하기도 한다. 한편 상해임시정부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로 확정한 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비록 조국은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타국 땅에 망명하고 있는 임시정부라고는 하지만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중국으로 달려왔다. 취임식을 거행하고 집무에 들어갔으나 풍찬노숙(風餐露宿),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임정요인들의 생활상은 미국에서의 생활과는 딴판이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한 맛을 들인 이승만에게 상해임정은 걸인과 노숙자의 집합소였을 뿐이다.

 

그는 6개월 정도 상해에 머물다가 자금염출과 독립운동 조직을 한다는 핑계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중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임정에서는 대통령 부재로 인한 온갖 불편을 서신과 전보로 호소했으나 이승만은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하는 수없이 의정원회의를 열어 이승만대통령을 탄핵한다. 한때 최고영광의 자리였으나 이제는 지옥으로 전락한 셈이다. ‘외교’를 독립운동의 지향점으로 설정한 이승만에게 임정대통령은 명함용에 불과했으며 일제와 몸으로 부딪치며 투쟁하는 것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광복 후 미국의 지원으로 초대대통령에 취임할 때 취임식장에는 커다랗게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이승만이 ‘건국’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임정 초대대통령이었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모든 관보에 임정의 연호를 계승하여 ‘건국30년’으로 표기한 것만 봐도 그 자신 임정을 건국원년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 없는 헌법전문(憲法前文)이 우리에게는 있다. 여기에는 건국의 역사를 3.1만세운동과 4.19혁명정신을 계승한다고 못 박고 있다. 이를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극우세력들이 이승만 자신이 인정한 임정의 가치를 뭉개버리고 건국대통령과 국부로 옹위한다. 그런데 극우도 안 되는 국민의당 한상진이 느닷없이 이승만 국부론을 내놨다가 4.19혁명공로자회의 호된 질책을 받고 백배사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을 ‘독립전쟁의 아버지’로 부르지만 국부는 아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남미5개국 독립에 기여한 시몬 볼리바르, 수천 년 계속된 중국의 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을 세운 손문, 터키의 문자를 개선하고 현대국가화 시킨 무스타파 케말, 인도의 성자 간디,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 등은 각기 자기 나라에서 국부 호칭을 받기도 하지만 이승만처럼 미화시키거나 억지 주장은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국부가 되려면 국민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영광은 희생할 줄 아는 인격을 갖춰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