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중앙뉴스=신주영기자]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디플레이션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지난 29일 경기 부양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라는 극약 처방을 발표했다.

 

일본과 유럽을 비롯해 지나치게 낮은 물가 때문에 경제가 위협받는 나라는 세계 곳곳에 적지 않다. 31일 블룸버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소비자 물가지수(CPI) 상승률 추정치가 전년 동기 대비 기준으로 마이너스인 나라는 스위스(-1.4%), 이스라엘(-0.9%), 태국(-0.9%), 싱가포르(-0.7%), 스페인(-0.5) 등 10개국이다.

 

물가 상승률이 0%대인 국가는 그리스·영국(0.1%), 독일·이탈리아·프랑스(0.2%), 일본·대만(0.3%), 미국(0.5%) 등 27개국이다. 유로존은 0.1%로 추산됐다.

 

집계 대상국 81개 가운데 물가가 1%도 채 오르지 않은 나라가 3분의 1을 차지했다.

 

◇ 일본·유로존, 디플레 탈출 최대 과제…미국·한국도 저물가 고심

 

물가가 낮아진다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소비자들이 가격이 계속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비를 미루게 된다. 기업도 투자를 늦추고 경제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대표적 예다.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0' 아래로 떨어뜨린 것은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일본은 소비자 물가상승률 목표인 2%에 한참 못 미치는 0% 가까운 수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변동성이 심한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작년 12월에 전년 동기비 기준으로 0.1% 상승하는데 그쳤다. 작년 12월의 전체 CPI는 0.2% 올라갔다.

 

일본은행은 지난 29일 기준금리를 0.1%에서 -0.1%로 낮추면서 2016회계연도(2016년 4월~2017년 3월) 물가 전망을 '1.4% 상승'에서 '0.8% 상승'으로 하향조정했다. 이와 함께 '물가상승률 2%'라는 목표의 달성시기를 종전의 '2016회계연도 후반쯤'에서 '2017회계연도(2017년 4월∼2018년 3월) 전반쯤'으로 6개월가량 늦췄다.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려던 일본이 침체의 늪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까지 디플레이션에 빠졌다가 아베노믹스로 2012년부터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다시 고꾸라졌다"면서 "고령화 등으로 일본 경제 전반의 활력이 저하됐고 최근의 유가 하락도 있다. 일본은행이 마이너스금리를 도입한 것은 큰 틀에서 디플레에서 탈출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엔화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행보다 앞서 주요 중앙은행으로는 처음으로 2014년 6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던 유럽중앙은행(ECB)도 디플레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에너지, 식품 등을 포함한 유로존의 1월 전체 CPI 상승률(추정)은 0.4%로 전월의 0.2%보다는 높았으며 2014년 10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기저효과에 의한 것이라 낙관할 수 없다는 분석이 많다.

 

유로존의 CPI 상승률은 ECB의 목표인 '2% 바로 밑'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지 3년이나 지났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고질적인 저물가에서 벗어나려고 3월에 추가 부양책을 도입할 수 있다고 최근 시사한 바 있다.

 

미국도 시장의 인플레이션 예상지표가 떨어지고 있어 저물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추가 금리 인상 결정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현저히 못 미치는 상황이 계속되면 금리 인상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도 지난해 경기 부진과 국제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연간 0.7%로 집계돼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 디플레 세계로 번지나…"중국의 최대 수출품"

 

중국의 경기 둔화와 국제유가 하락 등으로 디플레이션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원자재 수요국인 중국의 경기 둔화로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은 급락했다. 이 때문에 물가가 낮아져 세계 경제에 디플레 압력을 가중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소로스펀드의 조지 소로스는 최근 다보스포럼에서 중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이 세계로 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디플레이션 요인이 3가지 있다면서 "중국, 석유와 원자재 가격 하락, 경쟁적인 통화 절하" 등을 꼽았다.

 

그는 1930년대 이후 80년만에 처음으로 글로벌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발 디플레가 세계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투자 중심의 경제에서 소비자 지출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원자재 수요가 감소하고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중국은 과도기적으로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수출을 늘리려고 위안화 절하를 유도하면 다른 나라들에 디플레 압력이 가해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경제도 일본이 20년간 그랬듯이 디플레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기도 했다. 중국도 갈수록 거센 디플레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의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지난해 12월까지 46개월 연속으로 하락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지난해 3월 "중국은 디플레 상황이 아니다"면서 다른 국가로 디플레를 수출하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등 여러 나라는 중국산 수입품 가격 하락으로 디플레 압력이 더 높아졌다. 저가 제품 때문에 물가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중국의 설비과잉으로 수출이 급증한 철강 등의 일부 분야는 특히 상황이 나쁘다. 고속성장기에 생산설비를 늘린 중국의 제조업체들이 성장둔화를 극복하기 위해 수출길을 찾아 나서면서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물가를 짓누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철강 제품의 일본 내 가격 하락률은 지난해 11월 12%로 높아졌다.

 

◇ 후진국도 디플레 고통

 

디플레이션은 일본과 유럽 등 선진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때 초고물가에 시달렸던 짐바브웨는 이제 디플레가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짐바브웨는 지난해 물가가 2∼4% 하락한 것으로 추산된다.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데다 자금난에 몰린 기업의 대량 감원이나 임금 미지급으로 디플레는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사이에도 밥값이 올랐던 이 나라는 2008년에 달걀 하나를 사려면 10억 짐바브웨달러가 넘게 필요했다. 100조 짐바브웨달러 지폐까지 등장했던 당시 물가상승률은 약 90 섹스틸리언 퍼센트를 기록했다. 이는 9 다음에 '0'이 22개 붙은 것이었다.

 

짐바브웨는 2009년 자국 통화 발행을 중단하고 미국 달러화를 도입했다. 이후 물가 상승이 아니라 하락을 걱정하는 형편이 됐다.

 

짐바브웨의 생산 시설 가동은 2011년 57%에서 34%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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