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라는 호칭은 약간 구시대적이지만 이기택에겐 이 호칭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는 야당의 총수를 6년이나 해온 경력이 뒷받침하지만 그 시절에도 ‘대표’라는 직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통칭하여 ‘민주당’의 총재로 야당의 리더 역할을 감당해 왔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어떻게 호칭을 시용하는지 눈 여겨 볼 기회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한번 장관이면 죽을 때까지 ‘장관’으로 부른다. 국회의원 역시 마찬가지다.

 

이기택총재는 국회의원을 자그만치 일곱 번이나 역임한 사람이니 의원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한번 입에 밴 총재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인가. 총재가 떠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에 함께 참석한 그는 모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평소 고인과 나눴던 많은 일화들을 떠올리며 후배들과 따뜻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두툼한 담요로 목을 감싸면서도 영결식에 참석한 관계요인들과 차마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김영삼이나 이기택 모두 20대에 국회의원에 당선한 사람이며 그 덕분에 승승장구한 면모도 거의 똑같다. 더구나 고향은 각기 거제와 포항이면서도 중학교 시절부터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들을 부산 이외의 지방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기택은 고향인 포항 청하면에서 태어났다. 청하면에는 천하명산으로 알려진 내연산이 있는 곳이다. 내연산 골짜기에는 참으로 멋진 폭포들이 올라갈수록 그 위용을 자랑한다. 내연산에는 천년사찰 보경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언제 누가 썼는지도 모를 옴마니반메움이라는 불경 글귀가 이상야릇한 모양새로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 항상 인상 깊다.

 

이기택은 향리에서 청하초등학교를 마쳤다. 청하초교는 심심산골 시골구석에 있는 학교지만 그 역사는 장장 백년이 넘는다.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하여 부산중학교에 입학하며 부산상고로 진학했다. 부산상고는 부산의 명문으로 김지태 등 유명한 기업인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정치인으로도 이기택을 비롯하여 정해영 신상우 노무현 등이 나왔다.

 

이기택은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가장 많은 촉망을 받아온 사람이다. 누가 뭐래도 그의 뒤에는 늘 ‘차기 대통령’이라는 닉네임이 따라 붙었다. 젊은 정치인이 오직 자기의 소신만을 가장 강조하는 특성을 보였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드시 정도와 정의의 입장을 고수하는 면모를 확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가 신민당 사무총장 시절 이철승과 김영삼이 대결했을 때 과감히 끈질긴 인연을 끊어버리고 김영삼을 선택함으로서 정치기류를 변모시켰던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하는 정치후일담이다.

 

그의 일생은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평소 손사래를 치며 이를 부인해왔다. “나에게 가장 큰 인생의 기점은 4.19혁명이었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국회의원에 거듭 당선하고 높은 당직을 수도 없이 맡았지만 그것은 모두 살아가는 과정의 곁가지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본인이 선택한 생활의 일부분이었지만 4.19혁명은 국가와 민족의 염원을 모두 담아낸 운명의 주사위였다는 뜻이다. 광복 이후 피비린내 나는 6.25민족상잔을 겪으면서도 정치파동, 발췌개헌, 삼선개헌 등 악정과 폭정을 거듭하는 이승만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사라진 지 오래다.

 

국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신익희선생과 조병옥선생의 잇단 죽음은 모든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 이상의 퇴로가 없었던 국민에게 자유당정권은 3.15부정선거라는 폭거로 불을 질렀다. 울고 싶은데 뺨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웅성거리는 국민여론은 민감한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파되었고 대구 2.28의거와 마산 3.15의거가 폭발하면서 국면은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제는 대학생들이 나설 차례다. 전북대에서 4월4일 최초의 대학생궐기가 있었으나 지방대학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묻히고 말았다. 이 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고려대다. 그들은 4월18일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귀교 도중 청계천 천일극장 앞에서 자유당이 사주한 정치깡패들의 기습에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 때 고대 학생위원장으로 이들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이기택이다. 이기택처럼 신중한 사람이 결정적 시기에는 놓치지 않고 바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역사는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4.18의거는 이 나라 역사를 뒤바꾼 엄청난 역할을 해낸 것이며 그 한가운데 이기택이 있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평생 지고가지 않으면 안 될 멍에가 되어 늘 고통과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박에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3당야합을 거부하여 여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무너뜨린 이기택은 김대중과의 합당과 결별시에도 자신의 눈꼽만한 사적인 이익보다는 과감하게 대의명분을 찾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가 큰 길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이익에 매달리지 않은 것은 참으로 거인이요 대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제 그는 모든 짐을 훌훌 던져버리고 미련 없이 떠났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했던 자서전은 아들 성호가 완성할 것이다. 아! 이기택총재여! 이 땅에 남은 모든 허물은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삼가 4.19회원 모두의 염원을 담아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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