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광복과 함께 신탁통치냐 반탁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좌우 진영이 극한적 대립양상을 보이게 된다. 지난 2월27일 반탁학생운동의 기수였던 이철승선생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전국학련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을 기반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던 소석(素石)은 국회에 진출한 후 야당의원을 대표하여 자유당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5.16때는 미국에 망명했다가 귀국하면서 차기대권주자로 각광받았으나 호남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김대중의 술수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명함을 거둬들여야 했다.

 

소석의 대선배였던 고하 송진우선생은 광복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45년12월30일 한현우일당의 총탄세례를 받고 56세의 나이에 암살되었다. 암살범은 고하(古下)가 신탁통치를 찬성했기 때문에 처단했다고 큰소리쳤다. 모스코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은 국민정치수준과 경제사정으로 미뤄볼 때 당장 하기는 어렵다.

 

국제연합이 5년간 신탁통치를 한 다음 독립시키기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한국에서는 좌우불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내걸고 반대의 기치를 올렸다. 이 때 한국민주당 당수였던 고하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신탁통치는 어차피 5년이라고 하지만 3년만에도 끝낼 수 있다.

 

우리가 신중하게 고려할만하다”는 의견이었다. 광복직후의 한반도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남한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과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가 정치적 지도세력을 펼치고 있을 때다. 송진우는 민족주의 세력의 집결을 지지하여 좌우 협력에 의한 국민대회를 주장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암살되었으며 그 뒤 여운형 장덕수 등이 테러리스트의 총탄에 쓰러지고 ‘49년에는 김구마저 안두희의 흉탄에 희생되는 미증유의 암살정국이 이어진다. 이 와중에 흉악한 살인범들은 체포되긴 했으나 모두 외국에 망명하는 등 아리송한 비호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게 된다. 이승만의 배후설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탁에 대해서는 처음 반탁대열에 섰던 공산계열이 찬탁으로 돌아서고 남북 공히 3년간의 미소군정을 거치며 각기 독립국으로 분단되었으며 6.25는 3년간의 전쟁으로 민족분열의 처절한 상잔(相殘)을 보여준다. 이로 인하여 남북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지금도 으르렁대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은 정부수립 후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으로 표변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산피난지에서 정치파동을 일으키며 발췌개헌, 삼선개헌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그 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가 이끄는 군부는 5.16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장장 30년 가까운 군부지배가 이뤄진다. 이로서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화는 우파일색으로 변했으며 진보혁신세력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핍박을 받아야 했다.

 

고하는 오랜 세월 일제하에서도 굽히지 않고 일본유학시절에 만난 김성수 안재홍 김준연 여운형 장덕수 신익희 조봉암 김약수 조만식 등과 함께 독립을 모색해 왔다. 민족 민주 민생 민문주의를 구국의 기본사상으로 정하고 언론 교육 문화 활동으로 민족의 힘과 열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해방직전 패전을 의식한 일제총독부가 그에게 정권인수를 제의한 것은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고하는 단연코 이를 거부한다. 이처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가 독립이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반탁을 내건 우익의 발호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반탁의 여덕(餘德)으로 대통령에 올랐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한민당은 집권 후 발에 채였다. 만일 ‘45년도에 신탁을 받아들였다면 어차피 3년간의 미소군정을 대체하여 통일된 하나의 정부로 유엔의 신탁통치를 받았을 것이며 그 2년 후에는 분단되지 아니한 하나의 나라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하는 선진적이며 진보적인 사상가였기 때문에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깊은 구상을 가지고 신탁통치를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치욕적인 군정3년이나, 신탁5년이 뭣이 다르단 말인가. 더구나 신탁 후에는 모든 국제정치가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혜안을 보여준 게 아닐까. 고하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은 요즘 더민주당의 대표로 날리는 김종인의 조부 가인 김병로선생이다.

 

그는 조선이 낳은 두 인물로 율곡과 고하를 손꼽는데 서슴지 않는다. 6.25때 납북된 위당 정인보선생은 고하를 충무공 이순신에 비유했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요 동지들이 이구동성으로 누구나 존경하는 사상과 철학으로 후세를 가르치고 있는 율곡과 충무공에 비유한다는 자체가 송진우선생의 높은 경륜을 읽게 한다.

 

고하는 전남 담양출신으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기삼연(奇參衍)의 훈도를 받았다. 필자는 기삼연의 손자인 기노을(奇老乙)과도 친구지만 고하의 손자 송상현은 전주북중 동창이다. 고하의 비문에는 “의인은 예로부터 목숨대로 생을 마치는 일이 드물고 죽음을 예사로 여겨 갈 길을 돌아가는 듯하네.

 

온 나라가 모두 슬퍼하고 처자는 소리 내어 우는데 섣달그믐 망우리에는 눈만 펄펄 내리는가.” 그의 동상은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졌다. 고하선생의 재평가를 학계에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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