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나? 서울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길
서울 올레길 ⑤ … 개웅산~항동길



웬만한 동네마다 있을 법한 낮은 산, 고개 너머 길, 언덕, 고샅길……. 개웅산은 바로 그런 산이다. 12살 겨울방학 때다. 목조로 된 방앗간을 지나 참외밭, 수박밭, 저수지를 휘 돌아서면 70여 호의 사람냄새 풀풀 나는 고모집 동네가 나왔다. 그 때 아버지는 사업차 그 동네를 지나 또 하나의 방앗간을 지난 100여 호의 용두리라는 마을에서 잠시 지내셨다. 소꿉친구 하나 없이 언덕 아래의 노송 밑에 쭈그리고 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마냥 심심해했던 고개 너머 그 동네, 개웅산에서는 그런 동네를 만날 수 있다.

개웅산은 능선이 세 방향(개봉역, 오류역, 천왕역)으로 뻗어 삼각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이 산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대(烽火臺)라고도 부르며, 3·1운동 때도 마을 주민들이 이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개봉동과 오류동 일대에 지형이 움푹 들어가서 전쟁 때도 총탄이 '개웃개웃'(고개나 몸 따위를 이쪽저쪽으로 자꾸 귀엽게 조금씩 기울이는 모양이란 뜻의 북한어) 피해간다 하여 개웅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단다. 그래서 고층 아파트에 가려 산봉우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나 보다. 1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산책 겸해서 잠시 오를 만한 산 하나가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이렇게 멋진 산이 숨어 있었다니!

일단 집에서 가까운 개봉역에서 출발한다. 역에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인 개봉3동 한진아파트에서 내려 길 끝에서 좌회전하여 우측 등산로로 들어선다. 장작으로 낮은 담을 쌓고 봉숭아 같은 토속적인 화초들로 잘 가꾸어놓은 집이 멋스러워 기웃거려 보았다. 담 옆, 형태가 온전한 삼층석탑으로 뻗어가는 능소화, 집 뒤의 키 큰 해바라기, 토란대·고구마줄기 등으로 풍성한 밭, 자잘한 돌배나무, 옥수수 그리고 텃밭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까지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정경들이다.

개웅산 초입에는 바로 배드민턴장이 있고, 정자 같은 쉼터와 주민들 체력단련장도 함께 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모아 만든 연못에는 수초와 꽃들이 잘 자라고 있어서 쉼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배드민턴장 옆에서 기다란 조롱박이 여물어가고 있는 모습도 역시 이곳 풍경화에서 빠지면 안 되는 요소다.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일반버스에서 내려 개봉중앙시장을 지나 진로아파트 옆 개웅산 철쭉동산과 리기다 송림 입구로 오르는 길도 있다.



여느 산과 다름 없이 입구에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에는 ‘우리나라 주요 산 해발’도 함께 소개돼 있는데 그만 폭소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백두산 2,744m, 금강산1,638m, 설악산 1,708m, 한라산 1,950m 그리고 개웅산 125m……. 그 순간부터 동네 뒷산이나 언덕, 고개를 오르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었다.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고, 술래잡기라도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산에서 올려다 보이고 내려다 보이는 조망은 또 대단하다. 도덕산, 천왕산, 양지산 등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지고, 서울 서남부와 광명 경륜돔경기장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작은산, 낮은산에서 이런 옹골진 풍광들을 대할 수 있다니!

10년 이상 개봉동에 살면서 습관처럼 매일 이곳을 오른다는 박금자(60) 씨는 고향 언덕, 고향 동네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개웅산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님을 노인정에 모셔놓고 한 시간이라도 이곳을 다녀가야 컨디션 유지가 될 정도로 마니아다. 초등교장인 나병권(61) 씨 역시 이른 아침 개웅산을 한 바퀴 휘 돌고 나서 출근준비를 하거나 퇴근길에 들린다. 개웅산에는 연세 높으신 분들이 참 많다. 마치 장수촌에 온 것 같다. 산행이 어려운 고령자들도 쉬엄쉬엄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산의 매력이다.

산촌에 사는 학생들의 통학길 같은 그런 산길이나 오솔길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산벚나무, 때죽나무, 산사나무, 굴참나무, 리기다 소나무까지 수종도 참 많고, 야생화도 지천이다. 밤나무가 많아서 덜 여문 어린 밤송이들이 나무계단에 수북하게 쌓여있기도 하다. 다람쥐 천국이다. 아예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휙휙 지나가는 게 조금은 거만스럽게 보인다. 연 평균 10만여 명이 다녀간다고 하니, 우리야 반가워서 소리 지르며 쫓아가지만, 그 녀석들은 눈도 맞추지 않는다.



개봉역, 오류역, 천왕역으로 연결되는 125m 높이의 개웅산 등산로를 마치 접혀진 종이를 펴듯 잘 펴서 올레길로 알리고 싶다. 새소리 물소리 들어가며 이 마을 저 마을 언덕 넘고 고개 넘어 조랑 수수가 여물어가는 과수원길 지나 저수지 돌아돌아 학교 가는 학생들 발자국소리와 웃음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이 길. 여러 갈래 길이 곳곳에 뻗어있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개웃개웃 해야 하는 이 길을 ‘개웃개웃 올레길’이라고 명명하고도 싶다. 먼동이 트면 눈비가 내려도 얼마든지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뒷산 같은 도심 속 둘레길. 

천왕역으로 내려와 2번 출구 쪽으로 간다. 항동으로 가는 7번 마을버스가 왔다. 물론 그냥 걸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버스 타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대추가 주렁주렁 열린 낡은 주택가, 새로 지은 아파트 앞, 전철역, 상가 등등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가는 맛이 바로 쉼의 미학, 느림의 미학이다. 마을버스는 항동 저수지 앞에서 내려주고 되돌아갔다.

서울 첫 수목원인 항동 10-1번지 100,809㎡의 ‘푸른수목원’ 조성 공사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녹슨 철길 양 옆으로 원두막도 보이고, 논둑과 밭도랑 여기저기에 농사짓느라 구슬땀 흘리는 농부도 눈에 띄었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그늘에서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아저씨, 가족이 함께 텐트를 쳐놓고 낚시를 즐기는 모습도 평화롭다. 장맛비 때문인지 저수지 물은 황토 색깔 흙탕물이지만, 오히려 물고기들은 더 많을 것 같다. 옆 무논에서는 미꾸라지도 수십 마리 튀어나올 것 같다. 지금의 이 모습을 그대로 살려 고향 어디메쯤에 와있는 착각이 들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 모두를 서울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아니 가장 한국적인 올레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여기까지 놓치지 않고 달려온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까 마을버스가 꼬리를 보였던 그 곳을 따라, 큰길로 나가 2~3분이면 성공회대학이 있고, 유한대학도 있다. 2대에 걸쳐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창업자 고 유일한 박사를 기리기 위한 ‘유일한로’가 눈에 들어왔고, 학교 인근 인도에 세워진 ‘신뢰의 문’이라는 신영복 교수의 글이 새겨진 기념석도 뭉클하게 했다. 대형화돼 가고 있는 요즘 대학 캠퍼스에 비해, 아주 소박하고 울타리 하나 없는 성공회대학이 진정한 학문의 집처럼 느껴졌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손자손녀 데리고 와 화단이나 벤치에서 편하게 지내는 모습이 참 좋았다. 외형적으로만 열려있지 않고, 진정으로 열린 학교일 거라는 신뢰가 갔다.

개봉동에서 올라 개웅산 둘레둘레를 둘러보고, 오류역 방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천왕역 방향으로 내려가 항동 저수지와 철길, 들길을 지나, 성공회대학 교정과 유한대학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경인로에서 여의도로 가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후 2시, 일하다가도 쉬어야 하는 뙤약볕에 나선 올레길 탐험. 전혀 지치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렇게 흙길을 많이 밟아보기는 처음이다.

1.개웅산 코스는 개봉역, 오류역, 천왕역에서 오르는 방법이 있다. 단순히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산을 한 바퀴 돌아야만이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산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산의 높이:125m, 소요시간 1시간)

- A코스 : 천왕역 2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직진하면 기찻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서울방면이고, 왼쪽이 항동저수지 방면인데 도보로 30분 이상 시골길 
            걷는 마음으로 가면 된다. 개발 때문에 지금은 어수선하니 천왕역 주변에
            서 7번 마을버스를 타고 항동저수지 앞에서 내리면 편하다.
            (마을버스 15분 소요)

- B코스 : 개웅산에서 오류역 쪽으로 내려가 버스나 도보로 가는 더 가까운 방법도
             있다. 오류역에서 수목원으로 가는 철길자전거길도 개발 예정이고, 오류
             동에 제물포와 한양을 오가던 이들이 밥과 술을 먹고 하룻밤 묵어간 '주
             말거리객사'도 복원할 계획이다.

2. 2011년 12월 수목원 완공 이전 항동의 옛모습(저수지, 철길, 논두렁밭두렁)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1시간 소요) 식사 시간이 되면 인근식당에서 토종음식을 찾아도 된다.

3. 개웅산에 오를 시간이 안 되면 7호선을 타고 온수역에서 내려 도보로 가면 10분이면 갈 수 있고, 경인국도 인천방향 버스를 타고 성공회대학교 앞에서 내려 5분이면 항동 수목원 예정지로 갈 수 있다.
출처:서울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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