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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 갱신
고경숙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흔쾌히
계절이 바뀌었다
삐거덕거리는 목뼈에 잇댄
척추를 사다리 삼아
끈질기게 오르내리던 저녁은
올 들어 이백 번째 나를 방문했다
고용하지 않아도
내 곁을 지켜주는 것들은
주로 호불호가 분명한 장기거주자들,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걸고 간
오래된 언약과
폭우에 건네받은 우산 한 자루,
봉숭아 짓이기며 엄마가 감아주던
하얀 실타래
십 년은 족히 지났을 커튼자락 너머로
울며 웃던 하늘빛
그리고
가끔은 넋 나가는 내 기억력
.
.
.
이 쨍쨍한 여름날,
너희를 허하노라
(시집 『유령이 사랑한 저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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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약속이나 한 듯 이 장맛비와 땡볕 여름을 건너야 한다. 약속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반복되는 것들이 어디 계절뿐이랴!
임대차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쌍방 간에 별다른 말이 없으면 자동으로 계약 기간이 연장되는 것을 ‘묵시적 갱신’이라고 한다.
위 시를 감상하다보면 화자에게도 여름마다 찾아오는 봉숭아물 같은 추억과 어떤 통증이 있음을 본다. 이 여름이 가면 함께 떠날 것들, 그리고 내년이면 또 찾아올 그것들...
내게도 해마다 이 우기를 타고 오는 그림자가 있다. 황톳물에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던 공포, 장맛비 속에 논물 대러 가셨던 아버지가 쓰러져서 업혀 들어왔던 일, 그리고 내 딸이 태어난 산달이라서 발목부터 시리고 욱씬거리는 통증 등... 갱신하고 도장찍지 않아도 내년에 또 올 것들임을 안다.
묵시적 갱신! 제목에 눈길이 자꾸 머문다. 우리의 묵시적 계약서 속에 새롭게 기록될 올해의 내용은 또 무엇이 될까? 뿌듯하고 두근거리는 일들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발간한 고경숙 시인의 시집『유령이 사랑한 저녁』에서 위 시를 맛있는 시로 올려보았다.
(최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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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제4회 하나 네띠앙 인터넷문학상 대상. 제2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제3회 두레문학상. 2011경기예술인상. 2012부천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수상.
현재 부천문인협회 회장. 수주문학상운영위원장. 부천시문화예술위원.
시집 / 『모텔 켈리포니아』 『달의 뒤편』 『穴을 짚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