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경순/ 고양올레길만드는사람들 대표는 9.13일에 고려제34대 마지막 공양왕에 대하여 재조명 했다.    

9월14일 고양시 향토조사단의 관리자 최경순 대표는 행정안전부(행안부)와 재)한국지적재산관리재단이 주관하는 향토자원발굴에 참여하여 고양시 문화재 관리의 실태를 조사했다.

다음은 그가 행사에 대한 소고다.



1. 서론

나는 올레걷기를 하면서 여러 회원들과 10차례 정도 공양왕릉을 지나쳤다. 그 때마다 공양왕릉을 바라보는 회원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의견으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은 첫째, 왕릉 치고는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둘째는 공양왕릉 위에 군림하는 주인처럼 자리 잡고 있는 사대부들 무덤을 보면서 누가 이곳에 무덤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물론 그들의 궁금증은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느낀 궁금증과 비슷하다. 조선시대엔 왕릉을 조성하면 그곳에서 시야에 보이는 모든 민묘를 이장시켰고, 집과 마을도 모두 이전시켰다고 하는데, 공양왕이 아무리 망한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이지만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무덤을 썼을까. 더욱이 태종 16년(1416년) 왕이 직접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냈으니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능임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올레걷기를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느끼는 이야기가 있는 걷기를 하기 때문에 그들의 궁금증에 대하여 나름대로 설명하곤 하였다. 그러나 올레걷기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너무나 시간적으로 제한돼 있고, 회원들의 관심이 깊지 않은 관계로 피상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는 이곳 무덤 주인공들에 대한 연구도 하였고, 그들의 혈연적 관계도 연구하였지만 늘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들 전체의 혈연적 관계와 인물의 활약상, 매장된 시기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해보고 싶었다. 올해 공양왕 관련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1차로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이곳에 매장된 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의 족보를 통해서 보다 세부적인 자료를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주 발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족보를 통한 세부적인 조사는 생략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번에 제출하는 소고(小考)는 인터넷 등을 통한 자료 수집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2. 공양왕릉 주변 묘에 대한 개괄

조선 초기 공양왕릉 주변에 묘를 쓴 가문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정연(鄭淵, 1389년(창왕 1)∼1444년(세종 26))의 세 아들을 포함한 연일(延日) 정(鄭)씨, 세종의 6번째 왕자 수춘군(壽春君, 1431년(세종 13) - 1455년(단종 3))과 그 후손인 전주 이씨, 신숙주의 7번째 아들 신형(申泂, 1449년(세종 29) - 1487년(성종 18))과 그의 후손인 고령(高靈) 신(申)씨 등 세 가문이다.

조선 초기 이곳 산은 연일 정씨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춘군이 죽었을 때 무덤 쓸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그의 어머니인 혜빈 양씨의 요청으로 수춘군 처가의 산인 고양 원당골로 장지를 정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전주이씨 대종회) 그리고 수춘군은 정연의 셋째 아들 정자제(鄭自濟)의 사위이고, 신형은 정연의 둘째 아들 정자양(鄭自洋, 1415년(태종 15)-1492년(성종 23))의 손녀사위로 이들은 모두 처갓집 산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최초로 묘를 쓴 이는 수춘군으로 1455년(단종 3)이다. 하지만 그의 묘는 공양왕릉이 있는 능선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방향에서)왼쪽 5번 째 능선(岡)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양왕릉 주변에 썼다고 보기 어렵다.

최초로 공양왕릉 근접거리에 무덤의 주인공은 1487년(성종 18)에 묻힌 신형과 비슷한 시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제이다. 정자제는 공양왕릉 왼쪽 3번째 능선에 묻혀있기 때문에 또 별개로 치자. 신형의 무덤은 얼핏 공양왕릉과 같은 능선으로 보이지만 오른쪽으로 2번째 능선에 묻혀있고, 공양왕릉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공양왕릉과 같은 능선이면서도 왕릉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에 무덤을 쓴 최초의 인물은 정자양이다. 이분은 1492년 사망하여 이곳에 묻혔다. 두 번째 이곳에 묻힌 이는 명종 때 대제학과 좌찬성을 지낸 신광한(申光漢, 1484년(성종 15)~1555년(명종 10))으로 그의 묘는 공양왕릉에서 바라보면 맨 위 정자양 묘 바로 뒤에 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무덤을 쓴 이는 신광한의 손자 신홍점(申鴻漸, 1551년(명종 6) - 1600년(선조 33)) 형제이다. 이 중 신홍점의 사망연도(1600년)와 이곳에 석물을 설치한 년도(1607년)가 월사선생문집(月沙先生文集, 麻田郡守申公[鴻漸]墓碣銘幷序)에 분명히 나와 있다. 동 문집에는 신홍점이 죽기 전에 황해도 봉산(鳳山)에 있는 전사(田舍, 장원)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참고한다면 그 후손들은 그곳으로 낙향하여 1600년 이후에 더 이상 이곳에 무덤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공양왕릉 주변 묘 주인공들 가계도














정연































 























 

 

 

 

 

 

 

 

 

 

 

 









정자원



* 정자양



* 정자제



* 정자숙



3녀 안평대군













 











 





















* 장남 : 정부



* 사위 : 수춘군



 

 

 

 

 

 

 









 











4남 정위



1녀 고림정 이훈



2녀 운산군 이계

신숙주



 











 

















 



* 사위 신형

(신숙주 7남)









2남 정유침















 

 









 





















 







 

 

 

 

 

 

 

 

 









* 3남 신광한



3남 정황



4남 정철



1녀 귀인정씨(인종)



3녀 계림군 이유







 

































* 2남 신진



귀인정씨(선조)

























 





























 

 

 

 

 

 





















* 1남 신홍점



* 2남 신홍해



* 3남 신홍지





















1. [*] 표시는 공양왕릉 주변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임.

2. 정자제의 1자 정유(鄭濡), 4자 정수(鄭洙), 정유의 1자 정해(鄭瀣)의 묘는 정자제의 묘역 밑에 있음.

3. 정자숙의 맡손자 정맹수(鄭孟壽)의 무덤은 정자숙 묘 바로 밑에 있음.

4. 항공사진으로 본 공양왕릉 주변 묘 배치도

5. 가계도에 나타난 주요 인물 및 관계

인물에 대한 정보는 가급적 간략히 정리하겠다.

① 정연(鄭淵)

1389년(창왕 1)∼1444년(세종 2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심(仲深), 호는 송곡(松谷). 홍(洪)의 아들이며, 안평대군 용(瑢)의 장인이고, 송강 정철(鄭澈)의 고조할아버지다. 묘는 파주 통일동산 근처에 있다.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지평에 재직 중 당시 수상(首相)이던 하륜(河崙)을 탄핵한 일로 순금사(巡禁司)에 내려져 국문을 받았으나 속죄되어 풀려났다. 도관(都官)·정랑을 거쳐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에 오르고, 1420년(세종 2) 다시 장령이 되었을 때 상왕(上王: 태종)이 철원에 가려는 것을 간하다가 진산에 유배되었다. 1424년 다시 장령이 되고, 이어 선공감정·집의·동부대언, 형조·이조·병조의 참판을 지냈다.

1430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순부윤(仁順府尹)·중추원사,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442년 사은 겸 주문사(謝恩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② 정자양(鄭自洋)

1415년(태종 15)-1492년(성종 23). 정연의 둘째 아들이며 안평대군의 처남이다.

안평대군이 군부인 정씨와 사이가 안 좋아 군부인이 죽기 전 7,8년을 별거했고, 죽었을 때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정자양은 그의 형제들과 안평대군이 아니라 세조 편에 섰기에 멸문의 화를 면하고 세조 집권기에 승승장구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으로 녹훈(錄勳)(1457년(세조 3))되었다. 일찍이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벼슬이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②-1 정부(鄭溥)

정자양의 맏아들이며 신숙주의 7번째 아들 신형(申泂, 1449년(세종 29) - 1487년(성종 18))의 장인이다. 실록에 의하면 성종 16년(1485년)에 세자익위사 위솔(衛率 - 종6품) 벼슬을 한 기록이 있다.

③ 정자제(鄭自濟)

정연의 셋째 아들이며, 세종의 6째 왕자 수춘군((壽春君, 1431년(세종 13) - 1455년(단종 3))의 장인이다. 벼슬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成) 및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위양(威襄)이다.

실록에 성종 21년(1490년)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나온다.

④ 정자숙(鄭自淑)

정연의 넷째(막내) 아들이며, 송강 정철(鄭澈)의 증조할아버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김제군수를 지냈다. 실록에 성종 16년(1488년)까지 등장하고, 중종 5년(1510년)에 비석을 세운 기록이 족보에 있는 점으로 볼 때 1488년 - 151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⑤ 수춘군(壽春君)

1431년(세종 13) - 1455년(단종 3). 세종대왕과 혜빈(惠嬪) 양씨(楊氏)의 2남으로 태어났다.

수춘군은 22세 때인 1455년(단종 3) 교거(僑居.금성대군 저택)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그의 성격이 온유하고 화평하다 하여 `안(安)'이라 하고, 중년에 일찍 죽었다고 해서 `도(悼)'를 붙여 안도(安悼)라고 했다.

수춘군이 죽자 그의 어머니 혜빈 양씨는 수춘군 장지를 우여곡절 끝에 수춘군의 처가 산인 고양 원당골로 정하고 장사를 지냈다. 수춘군의 부인 영천군부인(榮川郡夫人) 연일 정씨(정자제의 딸)는 홀로 된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이라는 승방을 차렸다. 그리고 단종과 수춘군의 명복을 빌며 대궐에서 거느린 궁녀들과 같이 일생을 보냈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언덕 위 암자 원래 위치에 보존되어 있다.

수춘군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밀성군 셋째 아들 수안군(遂安君)이 대를 이었다. 수안군은 1455년(단종 3)에 태어나 1506년(중종 1) 당시 51세 때 중종의 명에 따라 부인 안씨와 슬하에 3남 4녀와 동반하여 수춘군의 후사로 입적하였다.

< 정복규 논설위원, 한국의 성씨 강사 >

⑥ 신형(申泂)

1449년(세종 29) - 1487년(성종 18). 신숙주의 7번째 아들이이며, 기재 신광한의 아버지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은 내자시정(內資寺正, 정3품 당하관)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위 ②-1 참조)의 딸 숙부인(淑夫人) 정씨(1454년(단종 2) - 1522년(중종 17))이다. (김안로의 希樂堂文稿卷之七 上)

⑥-1 신광한(申光漢)

1484(성종 15)~1555(명종 10).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2편의 몽유록과 소설에 근접한 2편의 전(傳)을 남겼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이다. 그의 집은 훗날 이승만씨가 거처했던 이화장(梨花莊)이었다.

영의정 숙주(淑舟)의 손자이고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조광조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1518년(중종 13)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다음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등용되어 이조판서·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다. 같은 해 우찬성으로 양관대제학을 겸임,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⑥-2 신진(申津)

1527년(중종 22)∼미상

선조(宣祖) 7년(157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증조부는 신숙주(申叔舟)이고 조부는 신형(申泂)이며 아버지는 신광한(申光漢)이다.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신진의 묘 바로 위, 정자양 묘 바로 밑에 있는 무덤은 비석이 없어서 누구의 묘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묘의 위치, 비석의 미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사 없이 죽은 신광한의 장남 신변(申氵+変)의 묘로 보인다.

⑥-3 신홍점(申鴻漸)

1551년(명종 6) - 1600년(선조 33). 신진의 맏아들로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지냈다. 월사 이정구선생 문집(月沙先生文集, 麻田郡守申公[鴻漸]墓碣銘幷序)에 보면 신홍점이 신광한의 낙봉(駱峰) 집(이화장)을 소유한 것으로 나오나, 죽기 직전에 황해도 봉산의 전사(田舍, 토지와 집)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손들은 그곳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생인 홍해(鴻海)의 묘는 신광한의 묘에서 신형의 묘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으며, 막내 동생 홍지(鴻沚)의 무덤은 신진 묘 우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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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묘 설치 순서 및 년도

번호

이름

생몰년도

묘지조성년도



수춘군

1431년(세종 13) - 1455년(단종 3)

14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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