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삶을 잇는 국회의원 윤소하

[중앙뉴스=임효정 기자] 어머니의 마음과 시선과 발걸음으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국회의원이 있다. 불의와 맞설 때는 그 누구보다도 강직하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다. 늘 삶의 현장에서 민심과 함께하기 위해 애쓰고, 민심이 원하는 것을 법제화시켜 다시 민생으로 돌려주는 일을 한다. 이렇게 정치와 민생을 잇고 있는 정의당 윤소하 의원을 <중앙뉴스>가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어머니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고 싶다는 윤소하 의원     ©김종호 기자

 

▲ 목포를 기반으로 30년 넘게 시민사회·진보정당운동을 해오셨는데, 목포에서 처음 청년 운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청년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 대학교 1학년 때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21일에는 목포에서 시민군이 결성이 되었는데, 당시 아버지가 교육계 공무원이셨습니다. 공무원이시던 아버지께서는 제가 고향 해남으로 돌아오길 바라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는 시민군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도피 아닌 ‘도피’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시민군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부채 의식이 계속 남아 있었고, 이것이 저를 청년 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공수부대를 제대한 뒤, 85년에 복학을 하고 바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이라는 곳에서 상근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청년 활동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지역 전체의 연대가 되는 운동이었습니다.

 

▲ 당시 어떤 활동을 했나요?

 

▶ 당시에 활동한 단체는 공개단체지만 합법적 단체는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수위가 강한 운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민들의 문제를 알리고 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수위를 높여서 반독재 운동을 하고, 독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목포의 소리’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87년에는 국민운동본부 조직국장을 맡았고, 이후 6월 항쟁에 함께 했습니다. 또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 연대 단체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주로 연대 단체를 꾸려서 연대 운동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22개 단체가 모여서 활동을 했는데, 그 가운데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이 있었습니다.

 

▲ 선창의 철부선 용접일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 학생 운동을 하다가 제적이 된 후에 청년 운동 상근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현대중공업이 된 곳에서 선창의 철부선 용접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노동 운동 쪽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활과 현장을 읽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위장 취업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직업훈련원 야간 과정을 들었습니다. 6개월 동안 다니면서 ‘보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지금은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조그만 철부선 만드는 조선소에 들어가서 증기 용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배운 기술을 써 보기도 전에 신기술이 개발이 되면서 기술을 써 볼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노동 운동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에 실패하고 다시 청년운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진보정당 소속으로 2008년(18대)과 2012년(19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셨지만, 각각 5.53%와 16.29%의 득표율로 낙선하셨는데,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회의원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나요?

 

▶ 저는 진보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진보 정치의 필요성을 느껴서 총선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호남이 어떤 야당의 지역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았습니다. 또 야당의 성격이 진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곳이 DJ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포에 진보정치를 가져오면 호남에 진보정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지만 목포에서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포에서는 민주당이 여당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목포를 바꾸면 정치가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전하게 되었고, 혹시 이번 총선에서 당선되지 않았더라도 계속 도전했을 것입니다.

 

▲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로 상임위원회를 지원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목포 농아원 사건, 특수학교 장애아 인권유린 사건 등을 접하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또 2010년 전국 최초로 학교무상급식운동본부 상임본부장을 맡으면서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들었습니다. 주민번호 뒷자리까지 적어야 하는 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480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여성과 장애인 문제, 또 복지 문제를 현장에서 보고 느끼면서 보건복지는 우리들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서 보건복지위원회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보건복지위원회가 정의당의 핵심적인 위원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최근 장애인 활동보조 수가를 최소 1만 원 이상으로 인상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수가를 1만원으로 책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 장애인 분들이 활동 보조를 받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분들은 폐쇄된 곳에서 가족들에게만 맡겨지고 있는데, 이 분들도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여기에는 국가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 분들의 활동을 도와줄 활동가들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당을 받으면서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활동보조인 분들의 노동권이 열악한데, 이 피해가 곧 장애인 분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제 생각에는 활동 보조인 분들의 노동권이 보장돼야 실제 장애인 분들에게 혜택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 6월 7일에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6월 20일에는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세월호 참사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렇게 세월호 참사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있을까요?

 

▶ 세월호는 사건도 사안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그대로 집약돼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이런 상황에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부조리와 모순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대참사입니다. 세월호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대한민국의 변곡점과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진상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혀서 미래 세대에 안전한 대한민국을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평화가 보장되는 질적 전환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돼야 합니다. 희생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주권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마저도 방치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권리이자 미래에 대한 전환점으로써 궁극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정부가 세월호특조위 기간을 임의적으로 해석해서 기간을 축소하고, 인력을 줄이고, 재정 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특조위 활동을 무력화 시키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조위 활동은 야3당의 공동 합의로 이뤄낸 것입니다. 정부는 유가족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에서는 특조위 활동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반인륜적이자 반민주적인 것입니다. 명확한 특조위 활동을 보장해야 합니다. 특조위 활동은 야3당이 8개 조항에 합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갑자기 뒤집어 버리면 안 됩니다. 야2당은 누구와 협치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야2당은 국민과 협치를 해야지 여당과 협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깨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깨는 것은 협치가 아니라 방치이자 몰염치입니다.

 

▲ 정치와 삶을 잇는 윤소하 국회의원     ©김종호 기자

 

▲ 백남기 농민에게도 꾸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유가 있으신가요?

 

▶ 백남기 선생은 보성 분으로 밀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오래하신 분입니다. 백 선생은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식량은 우리의 주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인데, 경찰은 여기에 상상할 수 없는 물대포로 대응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는데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국가의 폭력이 세계에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농민들이 더 서러운 것은 쌀값이 폭락한 것 뿐만 아니라 식량을 지키고자 한 일에 물대포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 농민을 폭력적으로 대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끝까지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 저는 정부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에 대한 활동을 보장해야 합니다. 자의적 해석으로 활동기간을 종료해 버렸는데, 이것은 무조건 막을 문제가 아닙니다.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여소야대의 민심을 뒤로한 채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반성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민의를 역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야당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20대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큽니다. 첫발을 이렇게 내디디면 안 됩니다. 대선 레이싱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민생 레이싱을 할 때입니다. 야당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야당에서 먼저 책임 있게 행동했으면 합니다.

 

▲ 정부에서 백남기 농민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 당연히 사과부터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는 강신명 전 경찰청장에 대한 청문회와 특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청문회와 특검을 통해 국가 폭력을 함부로 휘두른 사람에 대한 징벌적 과정을 확실히 해야 이후에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국회저출산극복포럼'을 출범하고,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계십니다.

 

▶ 4선이자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인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대표를 제안해서, ‘국회저출산극복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뜻 깊게 받아들였습니다. 저출산문제는 경제·사회·교육 문제가 응축돼서 나타난 것입니다. 저출산을 극복하는 과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재설계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단순히 법안을 발의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프랑스 대사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출산의 문제는 임신·출산·양육· 교육의 문제이며 국가에 책임이 있습니다. 저출산의 원인은 청년실업과 폭등한 주거비, 교육의 문제 등에 걸쳐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단순히 보건의료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전 국가적 차원에서 시스템을 갖춰서 해결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임시방편적인 대책만 내놓고, 구호만 외치고 있는데 전략적이고 중장기적인 전망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보건복지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위기의 문제로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지속 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저출산의 문제는 나라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거의 문제, 청년일자리의 문제, 일과 보육의 양립 보장성, 올바른 육아체계, 교육 지원 등 입체적으로 해결책을 짜야합니다.

국회에서도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문제는 대통령 상설 직속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문제를 아우를 수 있는 대통력 직속 기구가 필요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과 꿈에 대해 말해주시겠어요?

 

▶ 저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는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가족 공동체에서 마음으로 살림살이를 하는 분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이 아프다고 하면 잠도 못 주무시는 분이시지요. 진짜 정치가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과 시선과 발걸음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삶의 현장을 국회라는 공간과 이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의를 법제화하고 제도화해서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국회의원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회 안에서 만의 정치는 제가 원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보통 여의도 안에 갇혀 있는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을 이어내서 성과를 다시 민생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저는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한편으로의 소망이자 열망이며 이루고자 하는 꿈입니다. 이러한 밑돌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국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비례대표 의원이지만 목포에는 주마다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지금까지 30년 동안 시민 사회운동을 해왔는데, 국회의 일 또한 그것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현장에서 굉장히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아픔이 있는 곳이 바로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보건복지위원회에도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습니다. 보건의료와 복지 분야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비록 정의당이 소수당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쌓인 내공을 활용해서 충실히 활동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인터뷰 하는 내내 윤소하 의원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장애인·아동 등 약자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배려심 깊은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하고 우직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이 무더운 여름, 농민과 노동자들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윤소하 의원.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숨 돌림 틈도 없이 농민들이 여는 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바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정치하는 진정한 정치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늘 약자의 편에 서는 한 정치인을 보면서 우리 정치에도 한 줄기 희망이 빛을 비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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