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시험을 치른다. 국가의 인재를 뽑는 고급시험에서부터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도 대부분 시험을 치른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기뻐하고 떨어진 사람들은 다음 기회를 노린다. 합격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밤잠을 안자고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학교와 학원에서 선생님들의 열성스런 지도를 받는다. 예상문제를 얼마나 잘 맞히느냐 여부에 따라서 지도하는 선생님의 평가가 달라진다. 강남지역의 유명강사라고 하면 강의도 잘해야 되겠지만 얼마나 많은 예상문제를 학생들에게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의 척도가 된다.

 

소위 유명강사로 소문난 강사의 몸값은 일반인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러다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긴다. 얼마 전 학교선생님과 학원 강사 사이에 부적절한 커넥션이 발견되어 사직당국의 철퇴를 받은 일이 생겼다. 큰돈을 주고받으면서 사전에 문제를 유출시킨 사건이다.

 

이런 부정불법이 횡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험을 통해서만 모든 평가를 내리는 제도적 모순에 기인한다. 물론 특별한 대책이 따르지 않는 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시험이라는 제도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인류가 발명한 최선의 방법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시하고 이에 맞는 정답을 기술하는 것이 시험원칙이다. 정답만 맞히면 합격이다.

 

여기에는 인성이나 인격은 고려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대입시험이 치러지는데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모두 합격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광복절에 박근혜대통령의 경축사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 의아하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신탁이냐 반탁이냐 하는 내부갈등을 겪으며 하나였던 우리나라는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이 각기 나눠 통치하는 기형적 분열로 치달았다. 신라통일 이후 하나였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근본원인은 일본에 있다.

 

일제강점 때문에 막상 광복을 이룬 다음에도 미소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했고 결국 3년의 군정을 거쳐 각기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를 수립한 이후 6.25라는 전대미문의 민족상잔까지 겪어야 했으며 지금도 북핵과 사드로 맞서 있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정부수립을 완료하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승만독재는 4.19혁명으로 막을 내렸고 박정희 유신군사독재는 10.26사건으로 종말을 고했으며 전두환 철권시대는 6.29항복 선언으로 물러갔다. 처절했던 독재를 마감하기까지에는 국민들의 저항이 가장 큰 힘이었지만 그것은 일제에 맞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선조들의 음덕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멀리 올라가면 보국안민을 외쳤던 동학혁명과 그 후에 계속된 항일 의병투쟁까지 거론되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내세운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탄생한 임시정부는 사실상 왕정을 끝내고 국민에 의한 정부를 표방한 실질적인 국민의 정부였다. 우리 헌법은 이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제헌 헌법전문에 이를 명시했다.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개헌이 있었지만 어떤 정권도 이를 부인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정신을 계승한다.”는 대명제는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역사로 건재할 것이다.

 

제헌 이래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기원은 임시정부에 있으며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을 역임했고 정부수립과 함께 거쳐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4선까지 강행했다. 초대대통령 취임식장은 이승만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건국’이라고 하지 않고 ‘정부수립’으로 명명되었으며 관보(官報)를 발행하면서도 임시정부 관보의 발행호수 다음 숫자를 기입했다. 비록 국가구성 요건은 갖추지 못했던 임시정부였지만 모든 사람들은 연면히 이어지는 불멸의정부요 국가로 인정했다.

 

이승만은 집권12년 동안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강화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임시정부의 법통만은 추호도 흔들림 없이 계승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건국은 이념의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헌법정신을 그대로 따르면 된다. 대학시험처럼 정답을 몰라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다. 밤을 새워가며 정답을 찾을 이유도 없다.

 

백과사전을 뒤척이며 어느 것이 정답일까 찾아보는 고생도 불필요하다. 정답은 68년간 지탱해온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이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맹목적 인사들이 간혹 건국대통령 운운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의 행태다. ‘이승만대통령’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를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국부라고 하던, 건국대통령이라고 하던 누가 시비하겠는가. 다만 부정선거로 4.19혁명에 의해서 쫓겨난 사실까지 부인한다면 그것은 큰 죄악이다. 역사는 냉엄하다. 공로를 내세우기 전에 역사는 영원히 간직해야 할 민족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 뿌리가 1919년 임시정부에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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