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9일은 경술국치 100주년이라고 해서 전국의 언론이 치욕적인 역사를 더듬으며 망국으로 들어섰던 조선조말의 설움을 부각시킨바 있다. 대저 나라가 허약하면 언제나 외적의 침범을 받아 피폐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그러기에 위정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으로 하여금 일치단결하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조말의 궁중정치는 철저히 백성을 외면하고 양반위주의 정치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불란서, 일본 등 열강에 빌붙을 수 있는 기회만 노렸다.

정승 판서라는 사람들이 친미파, 친일파. 친러파 등으로 갈려 서로 으르렁대는 형국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은 그나마 민족의 내일을 위한 백성의 궐기였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절박한 입장이 되어 일어선 것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혁명대열은 전라도 수부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정의 항복을 받아내 전주화약으로 집강소까지 설치하는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공주에서 대패하여 무너지고 만다.

때마침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내세워 마침내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뺏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성사시킨다. 이에 조선의 기개있는 선비들과 군인들은 자결하거나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만주 땅으로 이전한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일본의 압박을 피하여 남부여대로 낯 설은 곳에서 할 일이라곤 척박한 땅을 일구는 수밖에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던 선각자들의 고귀한 선견지명은 이주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일변 농사를 지어 가족의 생계를 이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군이 되어 왜적에 대항하는 군사조직을 이루기도 했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한 것이나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에서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일본정규군 1개 사단을 섬멸한 것은 자랑스러운 대첩기록이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의 대표적인 면모가 역사를 빛낸다. 더구나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상해에서는 애국선열들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선포했으며 이를 박살내려는 일본의 탄압은 더욱 가열되었다.

임시정부는 박은식이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연로하여 곧 사퇴하고 이승만이 뒤를 이었으나 그는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그쳤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구를 주석으로 뽑아 이봉창, 백정기, 윤봉길 등을 길러내며 일본과의 전투적 역량을 키웠다. 특히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은 일본요인들을 대량 살상시켜 큰 충격을 줬다. 이에 대해서 중국의 장개석은 “4억 중국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청년이 해냈다”고 극구칭찬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편의제공에 보탬이 됐다. 이 사건으로 흥분한 일본 군부는 마구잡이로 극열한 탄압을 가했다.

도산 안창호선생도 이때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사직전 석방되었으나 곧 순국하고 말았다. 상해임시정부는 항주 등지로 피했다가 중경에 둥지를 틀며 여기에서 흩어진 독립군 대열을 통합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것이다. 1940년9월17이다. 광복군은 제1, 제2, 제3 지대로 구성되었다. 학병을 탈출하여 독립군에 합류했던 장준하 등이 광복군 제2지대에 소속되었으며 미군의 조선 상륙작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OSS부대로 깊은 유대를 갖는다. 광복군 창설위원장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다.

그는 광복군창설 대회사를 통하여 “국가를 광복하여 주권적 독립과 민족 생존의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왜적과 30여년 싸워온 우리는 천신만고 속에서도 광복군을 통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특히 한·중 양국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하고 왜적의 침략야욕에 항전하고 있는 중국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우리들이 전 민족적 무장역량을 자진 동원하여 중국전우와 더불어 공동전투를 펴서 중국과 한국의 원수를 보복하기를 서로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광복군의 사명에 대해서는 “험한 산과 깊은 물에도 뛰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창을 베고 밤을 새우는 삼한건아(三韓健兒)와 화북일대에 산재한 우리 백의대군과 또 국내의 삼천만 혁명대중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왜적의 철제(鐵蹄)를 단호히 쳐부수고 성스럽고 깨끗한 천직(天職)을 다 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70년 전 선열들이 뿌렸던 민족의 긍지와 각오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미 노쇠한 광복군들이 그날의 기개를 간직한 채 전쟁기념관에 모여 기념식을 열었다. 광복군창설위원장 김구의 손자인 김양은 지금 국가유공자를 기리는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장을 맡고 있다. 그의 감회도 새로웠을 것이다. 조국광복의 초석인 광복군들이 성취한 피와 땀의 노력과 희생은 후인들에게 선열을 추모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광복의 외길을 걸었던 걸음걸음이 이제는 세계로 떨쳐나가는 큰 뜻으로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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