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한나 기자


 슬

나병춘

 

 

누가 슬다 갔을까

이슬 머금은 잎사귀 뒤

아스라한 벼랑에

채 마치지도 못한

슬다란

동사,

 

동사는 마침표가 없다

누가 감히 '슬다'를 훼방 놓았을까

저 물푸레나무 열 시 방향

작은 가지에서

곤줄박이 하나가

부리에 소음 한 알

슬고 있다

 

'슬다'와

'슬프다' 사이

스카이블루 낮달이

물푸레로 춤추고 있다

 

저 낮달은

우주 모퉁이에

누가 슬었을까

슬슬 걷고 있는

이와 저 무릎

슬하 사이

****************************************

 ‘슬다’라는 동사는 생활 속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녹슬다. 좀슬다’ 처럼 좋은 쪽보다 나쁜 쪽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 ‘슬다’를 이토록 처연하면서도 따스하게 다가오게 만든 것은 시인의 힘이다.

무언가를 슬려면 숙주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인간도 어쩌면 지구라는 숙주에 붙어서 생명이 생명을 슬어가며 가문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며 국가를 이루어 가는 것 아닌가?

인간이란 어쩌면 끊임없이 슬다가 가는 생명체 중에 가장 질기면서도 가장 나약한 동물인 것, 그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해야한다’는 명제가 주어진다. '슬'은 무릎의 의미도 있지만 위 시에서의 ‘슬다’는 꿈이며 희망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저마다 땀과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을 시인은 위로하고 싶은게다. ‘슬슬 걷고 있는 이와 저 무릎 슬하 사이’에 걸어가는 생명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이 행간마다 숨쉬고 있다.

[최한나]

****************************************

나병춘 시인/

1994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 『어린 왕자의 기억들』 『하루』 『새가 되는 연습』

현. 월간 <우리시> 주간

산림치유학 박사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