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장섭 편집국장     © 중앙뉴스


새삼 지금와서 관심을 끄는 것은 1988년 11월,‘5공 비리 청문회’때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당시 정 회장은 전두환 정권시절 '일해재단' 모금과 관련된 증인으로 국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위에서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고 의원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했다. 정주영 회장의 발언에 순간 청문회장은 술렁였고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었다. 재벌 총수의 입에서 나온 양심선언은 찌라시로만 돌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그룹의 총수가 권력의 압박에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청문회를 바라보았던 대다수 국민들은 비애(悲哀)감 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청문회 마이크 앞에 섰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박 대통령과 개별 면담을 한 것으로 알려진 8대 대기업의 총수들이 무더기로 생방송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는 것이 아버지때와는 다르다.

다시말해 이번 재벌총수들의 청문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계 수장들이 총 출동하는‘블록버스터’급 청문회였다는 사실이다.

 

평상시 언론에 얼굴조차 드러내기 싫어하는 재벌 총수들 입장에서는 이날의 청문회가 곤혹스럽고 피곤한 청문회가 되었을 것이다.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모두 죄인이다. 비록 대한민국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재벌 총수일지라도 청문회장에 불려 나온이상 계급장 떨어진 죄인이고 범법자다. 따라서 의원들은 정경유착의 당사자로 지목된 재벌 총수들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정권에 빌붙어 더욱더 몸통을 키우려는 회장님들의 뒷면에 가려진 음흉한 실체를 밝혀야 하는것이 청문회 의원들의 의무이자 책임이기에 시작부터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번 재벌총수들 청문회의 쟁점은 박근혜 정부가 전경련과 재벌에게 800억이라는 뇌물을 상납받고 그 댓가로 재벌 회장의 사면과 황금알을 낳는다는 면세점 사업권을 남발하고 독점의 대형 유통망 사업에 심지어 삼대 세습과 노조 탄압 묵인하는 등 특혜를 재벌 총수들에게 선물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대통령과 재벌 총수가 각자 원하는 것을 주고받은 것으로 대통령과 재벌 총수간의 밀약(密約)이었고 과거로부터 아직 청산되지 못한 흑역사다.

 

언제나 그렇듯이 핵심 주범들은 미꾸라지 처럼 요리저리 빠져나가고 기업 총수들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업 청문회가 되버렸지만 정작 한방이 없는 맹탕 청문회가 되버렸다.

 

역대 정권에서도 청문회는 늘 있었고 청문의원들은 하나같이 '하이에나'의 기질을 닮은 의원들이 각 당을 대표해서 나섰다. 굶주린 '하이에나'는 먹잇감을 앞에두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가 비록 자신보다 강자 일지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점찍은 먹잇감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빼앗는 밀림의 깡패다. 한치의 고민도 망설임도 없다. 바로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삼켜버린다. 하지만 이번 재벌총수 청문회에는 국민들이 기대했던 '하이에나'는 없었다.

 

재벌총수들도 억울한 면이 있을수 있다. 故정주영 회장 같은 폭탄발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어야 한다. “기업이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뼈있는 말을 남겼던 김승연 한화 회장조차 정작 청문회장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 기대가 실망으로 비뀌는 등 청문회의 민낮을 그대로 들어냈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총수들의 현 주소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청문회를 주시한 것은 국정농단 의혹을 소상히 밝히고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정경유착을 단절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이런 기대는 몇 시간 만에 여지없이 배신당했다. 의원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을 묻기만 급급했고 총수들은 알맹이 없는 답변과 동문서답·모르쇠·변명 등으로 핵심을 피해갔다.결국 공허한 질문에 공허한 답변만이 청문회장을 메아리쳤다.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에 대해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청와대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며 강제성은 시인했지만 사업 특혜나 총수 사면 등 대가성 의혹은 부인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사회공헌이든 출연이든 어떤 부분도 대가를 바라고 하는 지원은 없다”고 일축했고

최태원 SK 회장은 “할당받은 만큼 냈다. 대가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출연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신동빈 롯데 회장은“면세점 추가 입찰이나 수사 관련 로비와는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대가성이 없었다는 재벌총수들의 앵무새 답변은 여전히 뻔뻔했다.

 

이번 재벌총수들의 청문회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청문회로 기억될 수도 있다.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총수들이 증인이라는 신분으로 한자리에 모인 청문회였기 때문이다.

 

비록 "네 죄는 네가 알렸다”로 호통치기와 망신주기 식의 원님재판 청문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솔로몬의 지혜가 나올법한 품격 높은 청문회를 기대했지만 끝내 아니올시다로 끝이났다.

 

청문회 수준도 국격(國格)이 있다. 청문회는 그야말로 묻고 듣는 자리며 의원들의 고성(高聲)을 듣는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의원들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들의 얘기를 차분하게 듣고 진실 규명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쇼맨십으로 청문회 스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번 청문회는 해외에서도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료 등을 바탕으로 진실에 접근하는 품격 있는 국조가 돼야 한다. 필자(筆者)는 이제 역사에서 부끄러운 대통령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언(諫言)하고자 한다.

 

이번 차제에 정권이 기업을 겁박해 강제 모금하는 악습을 확실히 끊어야 하고 기업들도 돈은 돈대로 뜯기고 욕은 욕대로 먹지 않도록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재벌이 각종 이권을 챙길 때,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피눈물이다.재벌들의 청문회는 끝이났지만 이번 청문회가 정경유착 청산의 출발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230만명의 국민들이 촛불의 명령"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순간은 모면할 수 있지만 진실을 영원히 덮을 순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청문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중앙뉴스/윤장섭 기자/ news@ejanews.co.kr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