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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성향숙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 보이는 무덤과

낮은 지붕과

짱짱하게 내리쬐는 태양과

 

할머니가 언덕에 선다

어머니가 언덕에 선다

언니도 나도 동생도 언덕에 선다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살았다

매일 밤 이불 속에 들어가

하릴없이 울었다

 

바람이 지나가고

달이 백만 번 커졌다 작아진다

다리 밑 시냇물 더디 흐르고

낮아지는 구릉과

키 작은 나무들이 쓸쓸히 굽었다

 

몇 겹으로 가려진

검은 창을 스크래치하면

간간이 새어나오는 노란 웃음

골목이 길다

 

언덕 가득 벗어놓은 가로등빛 아래서

고양이 늘 서성거리고

건너야 할 다리와

다리 밑의 푸른 물빛과

빨려들어 갈 긴 골목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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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기억 저장소에는 몇 장의 그림들이 살고 있을까? 그 중에서도 가장 명징한 그림은 또 어떤 것일까?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눈물도 살고 봄꽃 같은 웃음들과 외등이 저녁마다 기다려주던 깊은 골목도 살고, 세월이라는 화물 열차가 싣고 떠나간 그 흔적들...

잠시 시인의 추억 어린 동네를 감상해보았다. 싸아해지는 가슴이 한 장의 그림을 읽었다. 여자들만 살았던 집, 가끔은 하릴없이 울던 집, 하지만 시인은 이젠 그 시절의 그림이 결코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간간히 흘러나오던 웃음이 있었으며 언덕 가득 비춰주던 가로등 불빛 같은 가족들의 체온이 시로 승화하였으므로...

그 시절과는 비교할 바 없이 풍족한 오늘이건만 그림일기를 보듯 그리움으로 꺼내보는 것은 가슴까지 데워줄 그 무엇에 대한 결핍 때문인지도 모른다. 검은 창처럼 어두웠던 마음이 시인의 그림일기에 씻긴다. 잠시 어린 날의 그 골목길, 그 언덕길로 달려가 보았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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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향숙 시인 /

2008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엄마,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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