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집 『초록방정식』펴낸 이희섭 시인

        

▲     서정시학 시인선137


그대로

이희섭

 

 

당신을 서랍에 넣어두고 나와서 걷는다

맨발로 오래도록 걷는 길에

달빛이 고여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생겨난 길

길은 어디론가 자꾸 가 닿으려는 마음이어서

걷고 싶은 발자국이 길을 만든다

 

어떤 표현도 초라하지 않은

둘만의 언어가 있어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

 

그대로,

더 이상 발자국이 생기지 않고

가끔은 그대로 멈추어서 쉬어도 좋은 길

보일 듯 말 듯

꺼낼 수 없는 당신의 말들을 품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더니

당신이 달로 부푸는 중이다

 

달이 그대로를 비추는 동안

밤이라는 서랍 속에서 서서히 만월로 차오르는 달

 

봄이 아니 온 듯 사라져 가고

아직 제대로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수없이 당신에게 도착한다

 

             - 이희섭 두 번째 시집 『초록방정식』(서정시학 刊)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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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번째 시집『초록방정식』을 펴낸 이희섭 시인의 서랍을 살짝 엿보았다. 고이 쌓아두었던 보석보다 빛나는 시들 속에서 오늘은 위 시를 소개해본다.

그대에게 닿기 위해 가는 길, 그대路! 내밀한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대, 그대로 그대 옆에서 안주하고 싶은 '그대로'를 걸어보았다. 저마다 삶이라는 길을 그래도 걸을 만한 것은 서로 부비며 기대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알아가는 누군가가 있어서일 것이다. 어쩌면 화자가 말하는 서랍속의 그대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있으며 그리움의 갈증일수도 있고 읽어도 끝이 없는 '그대'라는 책인지도 모른다.

‘봄이 아니 온 듯 사라져 가고/ 아직 제대로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수없이 당신에게 도착한다’는 시인의 싯귀처럼 이희섭 시인의 시의 길이 늘 수없이 도착하는 꽃길이기를 비는 마음이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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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섭 시인/

경기 김포 출생

건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스타카토』 『초록방정식』

한국작가회의 회원

현재 <詩우주> 회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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