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겸 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중앙뉴스

오늘날 정치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만연해 있다. 그 이유는 정치인의 행태에서 연한 것이다.

 

정치인의 추한 행태는 왜 발생하는가? 그는 권력 때문이다. 본래 권력은 국민이다. 철저히 갑은 국민이고 을이 정치인이다. 그러나 당선되고 나서부터는 정치인이 갑이 된다.

 

국민은 자신들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인이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선되는 순간부터 그 정치인은 귀(耳)와 눈(目)을 모두 가리고 입(口)은 바른 말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사특한 말만 하는데 사용된다.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행태는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치에도 도(道)가 있고 윤리(倫理)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을 음미하는 것에서부터 정치인문학을 시작해 보려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에서 정치를 빼면 '동물'만 남는다. 즉 인간은 정치를 잃어버리면, 인간은 동물일 뿐이다. 따라서 짐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

 

짐승의 세상은 양육강식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양육강식이지만 인간의 세상에서는 이성적 도야를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성은 인간의 고유영역으로서 정치는 인간이성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인문학이 필요하다.

 

내가 정치를 한다면 난 팩트있는 정치를 하겠다.

2012년 9월 빌 클린턴은 한 방송에서 공화당의 사라 팔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We may be entering a sort of period in politics that’s sort of fact free, where the experience in government is a negative…" 즉, “팩트가 없는 정치”를 의미한다. 팩트없음은 네가티브 공격이다.

 

우리는 그런 팩트 없음에 속아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낙선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정치에서 팩트를 체크 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팩트 없음”은 막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막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과거 자신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한 발언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평소 소신대로 했으면 적화되는 길을 갔을 것"이라고 말 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거를 대지 못하면 그것은 “보편타당한 근거” 없는 막 된소리에 불과하다.

 

“보편타당” 하다함의 의미는 ‘
보편’, 즉 누구나 모두‘의 의미를 갖고 있고 ’타당‘은 말하는 목적과 맞아 떨어짐을 의미한다.

 

우리가 논문을 쓸 때 자신의 논문이 보편타당함을 각관적 근거를 들기 위해 각주를 달고 참고문헌을 제시한다. 그렇지 못한 논문은 논문으로서 기능을 잃게 된다. 이처럼 각주가 있고 참고문헌을 댈 수 있는 정치인이 그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문화 스타로 자리메김 할 수 있었던 것은 팩트 폭격이었기 때문이다. 논거없이 자신의 말만이 무조건 맞다고 하는 정치인은 아동심리학자인 피아제의 발달단계를 이용하여 말한다면 유아기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즉, 유치하다는 말이다.

 

정치인의 생명은 “신뢰”에 있다.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국내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안창호 선생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그들 중 안창호 선생이 가장 중요시하는 신용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산의 “힘을 기르소서”에서 힘은 인격, 지식, 금전 즉 인격의 힘, 지식의 힘, 금전의 힘이었다. 도산에게서 민족의 3대 자본(힘)은 우리를 개조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3가지 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힘인  '인격'이다. 도덕적 자본이다. 인격과 관련되는 자본을 신용(信用)으로 보았다. 믿을 信(신)자를 파자하면 “사람(亻)+말(言)”이다. 즉 사람의 말에서 ‘믿음’이 출발된다. 신뢰는 팩트에서 시작된다. 감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오류를 저지른다.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알맞은 전제에 호소하지 않고 상대적 정서에 영향을 주려 할 때 생기는 오류”이다. 감정을 흥분하게 만든다. 흥분하게 되면 비이성적이게 한다.

 

아무런 객관적 사실 없이 하는 말은 언어적 폭력이다. 그저 듣는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우리가 존경해야할 대상인데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강에 정치인이 빠지면 한강물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구해주어야 한다“는 식의 우스게 거리가 되었다. 그 이유는 그네들의 팩트 없는 행태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주요 덕목은 정의이다. 수천 년 전부터 서양에서는 플라톤의 ’국가론‘, 동양에서는 유학에서의 '의(義)’에 관해 논의해 왔다. 오늘날에는 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정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테미스(Themis)와 제우스(Zeus, Jupiter)의 딸 디케(dike), 로마신화의 유스티티아(Justitia) 모두 정의의 여신이다. 그녀들의 모습은 모두 “눈을 가린 채 한손엔 천칭(저울), 한손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판단을, ’칼‘은 거짓됨과 허구를 잘라냄을, ’눈가리개‘는 앞날에 대한 예지를 상징한다.

 

맹자의 道는 義에 있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의지단야(義之端也)라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端緖)라고 보았다.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義를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다. 義는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정의이다.

 

인간이 착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옳은 일을 추구하여(集義:집의)하여야 한다. 이것이 곧 지극히 크고 굳세며 올곧은 도덕적 기개인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사람을  大丈夫(대장부)라고 하였다. 대장부 같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集義에 힘셔야한다. 집의는 팩트만을 갖고 이야기 하는 사람만이 갖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이고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다.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다. 필자는 이런 정치인이 되고 싶다. 세르반테스의 말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Honest is the best policy)"를 가슴에 묻어본다.
 

/김정겸/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