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전대열]무릇 모든 생물은 최후를 장식하게 되어 있다. 식물과 동물 모두 이 세상에서 일정한 수명을 마치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 중에서 유독 인간만이 자취를 남긴다.

 

살아있을 때 끼친 업적이 길이 남기 때문이다. 음악인은 작곡과 노래로 남고, 미술가는 작품으로 남는다. 문학인은 소설과 시로, 정치인은 국가공헌으로 후세에 기억된다. 과학자는 발명품이다. 살아왔던 행적에 따라 이름과 함께 그 업적이 뚜렷이 기록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게 역사다.

 

누구나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독창적이고 확실한 업적이 있어야만 증거로 남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름 없이 사라진다. 그래도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종친회는 성씨별, 파별에 따른 족보를 만들어 “나는 누구의 후손이며 누구의 선조가 된다.”라는 기록을 남겨 놓을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대전에 있는 족보박물관은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을 살고 간 수많은 선인들에게 일말의 기억위안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큰 업적을 남긴 분들에 대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공동으로 기억하는 역사작업을 다투어 한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현창하는 것은 훗날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똑같은 애국행동을 해달라는 격려요 명령이다. 국립묘지를 만들어 모든 국민이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인 중국과 국경을 맞댄 반도국이면서 남해와 동해 쪽으로 섬나라 일본과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맞서 있다. 그래서 항상 오랑캐와 왜적들의 침입을 수없이 받아왔으며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을 치르며 온갖 수모와 핍박을 받아 온 처지다. 사실여부는 검증할 능력이 없지만 우리 민족이 외적(外敵)의 침략을 받은 횟수가 무려 980회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한일강제합방사건이다. 조선왕조의 무능으로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펴다가 일본에 당했다. 서세동점의 세계조류를 재빨리 간파했던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외국문물을 과감히 받아드리고 제국주의적 군비를 강화하여 조선을 집어 삼킨 것이다.

 

이에 저항한 동학혁명운동이 큰 울림을 주었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공주 우금치에서 처참하게 패퇴한 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약 강제합방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 때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살함으로서 한민족의 기개를 뽐냈으나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기는 어려웠다.

 

강제합방 후에는 3.1만세운동으로 민족자결을 외쳤지만 수많은 희생자를 낸 후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하여 본격적인 국권회복의 전초역할을 다했다. 상해임정은 4개로 갈라졌던 임시정부운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의 탄생을 만방에 선포한 역사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김구선생은 겸손하면서도 가장 치밀한 운동방향을 제시하며 중국본토와 만주일대 그리고 러시아 등지에 펼쳐져 있는 독립군과의 내적교류를 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확립했다.

 

때마침 1932년 4월29일은 일본왕 소화의 생일날이었다. 일본은 이날을 천장절이라고 부르며 공휴일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했다. 이를 본 땄는지 광복 후 이승만대통령 생일인 3월26일이면 동대문운동장에서 매스게임을 펼치는 등 요란을 떨다가 4.19혁명으로 추방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김일성의 생일날을 태양절로 정하고 엄청난 행사를 펼친다.

 

모두 일본왕의 천장절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들만이 행할 수 있는 난센스다. 당시 중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에서는 천장절을 경축하기 위하여 상해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을 홍구공원에 집합시켰다. 김구는 이를 놓치지 않고 강제병탄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 윤봉길이 자원하여 폭탄투척의 대임(大任)을 맡았다.

 

도시락폭탄은 당시 왕일서(王逸署)라는 이름으로 중국군 폭탄제조창장을 맡고 있던 김홍일장군이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 제공했다. 김장군은 광복 후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정치에 투신하여 양일동 정화암 장준하선생 등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유신독재와 치열하게 싸웠던 분이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현장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요인들을 모조리 살상했다. 이 사건은 임정을 못 믿었던 장개석정부를 크게 일깨웠으며 그 후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1932년5월25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18일 오사카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한 달 후 12월19일 일본9사단사령부 가나자와(金澤)로 옮겨 총살형을 집행했다. 일본검찰관은 “상해파견군 군법회의가 살인과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단속법칙위반죄로 언도한 사형을 집행한다.”고 집행문을 낭독한 후 유언을 말하라고 하자 윤의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형은 이미 각오한 바다. 할 말이 없다”고 잘라 말한 후 침착한 태도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일본군 기록에 쓰인 대로다. 스물넷의 나이로 조선민족을 위해 대명(大命)을 마친 것이다. 윤의사가 갇혀있던 오사카형무소와 사형이 집행된 가나자와사령부 자리는 현재 모두 공원으로 바뀌어 역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대장부(大丈夫)가 남긴 애국의 넋은 우리 민족의 갈 길을 밝혀주는 이정표로 남아 있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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