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진단을 발간하며
평화재단에서는 한반도문제의 긴급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평화재단의 임원과 전문가들, 그리고 필요할 경우 외부전문가를 초빙하여 정세분석하는 자리를 새롭게 마련하였다. 현안진단은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각종 정보들을 공유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감 없이 소개함으로써 바람직한 정책대안으로 수렴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지난 6월 4일(목) 평화재단 강당에서 가진 현안진단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주>
 
기로에 선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을 맞이하여 -
제 2 호 | 2009. 06. 11 (목) | 평화재단

    사   회 :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
    발   표 : 조 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토   론 : 박순성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하승창 (시민사회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윤여준(사회) : 최근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이라는, 두 가지 큰 일을 겪었다. 그 동안 많은 분석과 해석, 전망을 들었지만 이 두 가지 문제가 우리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해보여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 두 가지 문제를 다 다루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우선 노 전 대통령의 서거관련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조  민 : 지난 5월 29일 아침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을 우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사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아주 가파르게 두 동강나지 않겠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메시지가 많이 나와야 좋겠다는 데에 생각을 모았다. 극한 언어와 대립적인 갈등 양태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 차분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 논의를 위한 발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면에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얘기해보고 싶다. 마침 당일 오후에 노 전 대통령 노제 현장인 서울광장의 대한문 옆 임시분향소에 내걸려 있던 글쓴이를 알 수 없는 추모사가 무척 인상적이어서 옮겨 보았다.

      발제문을 토대로 말씀 드리겠다.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부쳐 -


발제 : 조 민(통일연구원 ’09.06.04)
追慕
고인은 민주주의 정착, 권위주의 청산, 남북 화해협력, 권언유착, 지역감정 해소, 빈부격차 해소, 복지정책 확대, 부동한 가격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고인의 방향은 옳았다.
- 글쓴 이 미상, 대한문 옆 임시분향소, 5.29 오후 1시-


1.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2009년 현재, 한국 사회는 안팎으로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다. 세계사적 좌표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찾지 못한 채, 민족사의 향방에 대한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지금 우리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그렇잖으면 퇴행의 나락 속에 빠지고 마느냐 하는 엄중한 기로에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둘러싼 ‘노무현 신드롬’은 우리 사회의 균열 지점을 재확인하고 확대․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다 북한의 핵실험과 국제사회의 제재 국면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한 민족, 두 국가’ : ‘한 국가, 두 국민’
분단과 분열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한 민족, 두 국가‘는 64년째 지속되고 있는 민족 분단이며, ’한 국가, 두 국민‘은 30년 가까이 겪고 있는 국가 분열 상태를 말한다. 남북한 분단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 두 국민’의 분열 상태가 구조화되어 사회통합을 가로막고 있다. 이념과 지역에 따른 분열은 수차례의 대선을 계기로 부각되는 정치적 국면마다 극심한 대립과 갈등양상으로 분출되고 또다시 재구조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균열은 이처럼 서로 다른 가치와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한 국가 내의 두 국민’의 존재양태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은 극복되어야 한다. 분열 속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통합, 사회통합의 규범과 논리를 제시해야 할 때이다.

2. 구기득권 세력(보수우파)과 신기득권 세력(진보좌파)의 대립구도
근대화를 성취한 보수세력과 민주화를 이끈 진보세력은 한국 사회를 끌어가는 주역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한국 현대사 후반기에 진보좌파는 1980년대 이래 30년 동안 역사 해석과 도덕적 가치의 우위를 확보한 가운데, 20년 동안 이데올로기 담론을 장악하면서 문화권력을 향유했다. 그리고 최근 10년 동안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 한국사회의 사회문화 구조와 정치적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계급관계의 전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보수우파의 강고한 물질적 토대와 경제적 기반을 잠식․훼손시키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보수우파의 구기득권 세력은 재벌, 조중동, 대형교회, 사학재단, 법조계, 제도권 학계․문화예술계 등을 포섭하고 있다. 진보좌파의 신기득권 세력은 대기업 노조, 공공부문 노조, 전교조, 대학․언론․문화예술계의 진보적 지식인 그룹, 시민단체 등을 망라할 수 있다. 진보좌파는 20여 년 동안 이데올로기 담론 장악과 대중적 지지기반을 통한 조직화 과정을 거쳐 10년 동안 국가와 밀착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해왔다. 2007년 12월 대선을 전환점으로 보수우파가 정권을 탈환함으로써 보수우파의 대반격의 국면을 맞이하였다.
보수우파는 정치적 회복을 배경으로 탈이념의 세계사적 추세에 부응하여 한국 사회의 이념적 및 사회문화적 가치체계가 역전=정상화 되고 정치적 사회문화적 지배기반이 자연스럽게 안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2008년의 ‘촛불’은 보수의 우려와 반감을 자극했다. ‘촛불’은 진보세력의 정치적 결집과 재기의 ‘횃불’로 인식되었으며, 아직 자리 잡지도 못한 보수세력(정권)의 기반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을 수 있다. 이에 진보좌파의 배제․약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진보세력의 결집을 우려하면서 정치적 기반의 재구축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기획’ 위에서 진보세력의 구심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의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보수정권과 국민의 눈높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는 대중적 매력을 지닌 ‘인간 노무현’에 대한 자연스런 추모의 감정이자, 보수 정부에 대한 거부와 지지의 철회이며 한국의 보수에 대한 실망과 분노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우리 국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갖지 못한 부분을 채워 줄 것이라는 바람과 요구 속에서 CEO 출신 대통령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선택했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진보세력의 지나친 이념 지향적 세계관과 미숙한 국정운영 방식에 지치고 염증을 느낀 나머지 보수우파 세력의 사회관리 능력과 국정 운영의 경륜에 사뭇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보수우파 세력과 보수정권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냉소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 없었다. 한국의 보수는 당장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행태를 보였다. 한국의 보수는 20~30여 년 동안의 민주화 과정을 통한 한국사회의 가치와 이념적 지형의 변화 구조를 읽지 못했다. 우리 국민의 보수의 선택은 ‘조건부 지지’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으며, 국민의 높아진 정치사회적 ‘눈높이’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노무현의 도덕성은 기본이다. 한국의 정치사회가 지금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권의 도덕성 자체는 이제 한국 민주주의가 양보할 수 없는 조그만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보수정권은 노무현의 도덕성은커녕 국정 운영과 사회관리 방식조차 구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긴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 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현 정부와 보수우파 세력의 정치사회적 정통성에 대한 회의와 거부의 몸짓으로 표출되었다.

4. 자연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써 다시 소생했다. 그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미완의 개혁’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다르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 노무현’을 말해야 한다. 5년의 임기 중 대통령 노무현의 정책에 대한 차분한 평가가 필요하다. 그는 권위의 해체, 우상 파괴를 추구했다. “바보 정치인으로 정치하면 나라가 잘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보는 ‘우직함’, ‘가식 없는 소탈함’, ‘정략적이지 않는 정치‘의 의미를 함축한다. 노무현은 철권 통치자로 군림했던 장군에게 명패를 던졌고, 재벌 총수를 호통쳤고, 지역정치의 맹주를 함부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국민은 너무도 통쾌했다. 그가 권력과 자본의 상징적 강자에게 거침없이 대듦으로써 대중의 억하심정과 꽉막힌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대중은 환호했고, 메니아들은 열광했다. 한마디로 그의 언행 하나하나는 국민 대중과 사회적 약자에게 눈물겨운 카타르시스로 와닿았다. 그래서 “당신이 있어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카타르시스 해소 차원에서 그쳤다. 정치인 노무현 식 정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맴돌았을 뿐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권위주위 청산, 남북화해협력, 지역감정 해소, 빈부격차 해소 등의 역사적 정치적 과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했어야 했다. 대통령 노무현은 그의 꿈과 열정을 대중적=국민적 ‘집합의지(élan)’로 승화시켜 국가적 과제를 국민과 함께 하나씩 풀어나갔어야 했다. 서민층의 신뢰를 얻고 기득권층을 설득하면서 국민합의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모든 정책의 좌초를 반대세력의 거부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다시 ‘정치적 선(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선은 정치적 의도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목표 달성에 있으며, 국가적 과제의 성공적인 수행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정치적 선은 정치적 업적과 정치적 책임의 문제이지, 정치적 선의(善意)의 문제와는 결코 상관이 없다. 이는 정치인에게 특히,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잣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덕목(德目)으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신려’(愼慮 political prudence)는 정치인 노무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5. 인터넷 민주주의와 여론의‘봉기’
한국의 정당정치는 형해화(形骸化)되었다. 정치적 아젠다는 정당 구도의 밖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다, 노동, 교육 등 정치사회적 이슈와 여론을 수렴하고 해소․해결하는 정당의 고유 기능은 상실된 상태다. 또한 정치시장의 저열한 메카니즘은 정당정치에 기반한 국민적 대표체계의 불합리성과 함께 위기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지역과 이념의 근친구조 속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정치시장에의 진출은 원천 봉쇄된 실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념과 지역 구도를 해소할 수 있는 보다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지역구도의 강고한 벽을 넘지 못했다.

인터넷 민주주의 : 스마트 몹(Smart Mob), 인터넷 게릴라
최근 한국 정치사회의 여론의 ‘봉기’는 인터넷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한국 민주주의 변화는 제도권 정당중심 민주주의 ⇒ 가두 민주주의(시민 민주주의) ⇒ 인터넷 민주주의로 변화되어왔다. 인터넷 공간에서 주요한 정치사회적 의제와 현안이 다루어지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선동적이고 무책임한 언술과 주장들이 제도권 정치사회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정당체제가 시민사회의 다양하고 변화의 템포가 매우 빠른 요구들을 수렴하고 거르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틀로서의 한계가 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론 형성의 장은 변화했지만, 건강하고 합리적인 공론 창출은 쉽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여당은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졌다. 서로 네 탓을 하며 예상되는 후폭풍 앞에서 개개인은 살 길만 궁리하고 있다. 야당은 그들이 ‘배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주를 자처하면서 반사이익을 노리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비겁한 정당’과 ‘야비한 정당’의 동거체제는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지겨움, 질곡이 있다.
‘스마트 몹’은 정치사회적 아젠다를 설정하고 토론을 통해 스스로 해결의 대안을 모색하는 한편, 당장 행동에 옮기는 대중이다. 촛불시위에서 보듯이, 스마트 몹은 ‘집단지성’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으나, 무책임과 익명성의 뒤편에서 책임 있는 제도권 정치를 희화화시키고 무력화하는 게릴라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제도권 정치 특히, 한국의 보수정치 세력은 이러한 인터넷 민주주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대중과의 소통 방식 소통 체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6. 새로운 모색 : 다시 출발선상에 서서
두 가지 노선이 가능하다. 하나는 대타협이다. 다른 하나는 제3의 대안세력의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좌파는 ‘사회’에 착안하고, 우파는 ‘국가’를 중시한다. 사회를 중시하는 노선은 민주주의, 사회적 형평, 노동․복지 분야에서의 약자 배려 등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국가를 중시할 경우 국가 발전 전략과 국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보수우파 정권이 제시할 수 있는 타협의 지점은 ‘동반성장’ 노선에 있다. 부강하고 잘사는 선진조국 건설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 함께 가자!”는 메시지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바로 이 메시지를 고대하고 있다.
제3의 대안세력 창출! 이념과 지역구도의 장벽을 허물고 21세기 통일과 미래를 향해 민족사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이 절실하다. 이 과업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소명이다.




토론 1. 박순성
조민 박사님이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보기 위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딘지를 여섯 가지 정도의 키워드로 말씀해주셨다. 현재 분단과 분열 상태에 있는 한국이라고 하셨는데, 제 식으로 표현하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위기 정도로 얘기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민주주의 자체가 단순할지 몰라도 현실에서 실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요사이 우리는 법의 지배를 말하고 있다. 법을 지키면서 국민을 통합하고 사회를 통합하자는 것이 정치적 과제인 것 같은데, 현 정부가 법의 지배라는 차원에서 지배 혹은 통치, 질서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면, 법의 지배를 강조할 때 16세기 17세기부터 나타난 근대적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강조한 것은 법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실정법을 강조하기보다 천부인권, 또는 자연권, 변화되어가는 상황에 맞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확장시켜주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다.
최근 지배, 질서 쪽에 강조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 표출을 수용하지 못하고, 소통과 사회통합을 막고, 분열을 가져오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한다. 과연 보수진영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진보진영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같은 말을 전혀 다르게 사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 구 기득권 세력과 신 기득권 세력의 대립구도라고 표현했는데, 문화권력이 나오는 데가 조·중·동, 대형교회, 제도권, 문화예술계라고 한다면, 지난 20년 혹은 최근 상황을 대립구도로 볼 수 있을까. 대립구도는 존재하겠지만 균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진보개혁 진영 정권 하에서는 불균형을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가 존재했지만, 이제 현실적 힘의 불균형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사라졌다. 대중들의 의식이나 문제제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지 않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조 박사님의 분석은 형식적 차원에서는 타당할 모르겠지만, 다양한 차원에서의 불균형에 대해 좀 더 문제의식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보수정권과 국민의 눈높이 부분에서 보수정권의 한계는 내용도 추상적이고, 지향점도 불분명하고, 어떤 것을 국민이 원하는지, 정권을 잡은 이후에 내세우고 있지 못하다.
넷째, 자연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부분에서 제기한 정치적 선에 대한 질문은 적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민적 정치인으로서는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을지 모르지만, 엘리트적 전망이 필요한 정책을 내세우는 부분의 역량부족이 결국 지난 5년 간, 2002년부터 2007년 사이의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선 나아가 정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다섯째, 인터넷 민주주의, 대중 민주주의, 전자시대의 민주주의에서 합리적 정치와 감성적 정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해있다. 전 세계 모든 정치 사회가 똑같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인 것 같다. 감성과 이성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지식인과 언론이 고민해야할 것 같다. 우리 언론과 지식인들이 신문사설과 TV토론 등을 통해 이성의 언술을 표현하기보다 감성의 언술에 치중해있는 것 같다. 연예인 언어와 정치지도자의 언어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타협과 제3의 세력 창출은 어떤 것이든 가능할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가이다. 이 사회가 부딪히고 있는 상황은 문제는 드러나 있는데 그에 대한 분석이 불철저하고, 자연스럽게 전망도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좋은 전망이 제시되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면 그에 따라 정치사회가 재편되기도 할 것이다. 정치 자문가, 정치인들의 성찰과 자기반성에 기초한 전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정도로 말씀드리겠다.




토론 2. 이상돈
노무현 전 대통령 유고 사건 이후에 방송 같은 데서 몇 번 말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싫어했던 사람인데, 방송 기자가 노 대통령이 공을 물어 와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기자가 노 대통령이 “지역감정을 해소하지 않았냐, 어떠냐?“고 물어와서, 나는 “그가 수도 이전으로 충청도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대통령이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회창 총재가 대선에서 2번 떨어진 게 충청도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냐. 그렇지만 수도이전 공약의 후유증이 얼마나 크냐”고 했다. “노 대통령이 도덕성이 있지 않느냐?”고 묻기에, “정경유착 끊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모럴리티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럴 때에는 사람이 좀 품격이 있어야 하는데, 말을 막하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그러지 않았냐. 그래서 도덕성 이미지와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공으로 인정할 만한 것은 정경유착을 공식적으로 끊었다는 것과, 그리고 검찰에 대한 통제를 놓아서 집권 초기에 측근들이 부패로 기소되었던 것은 인정할 만하다고 했다.
사람이 비극적으로 가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굉장히 어렵다. J. F. 케네디가 암살된 후에도 그에 대한 복잡한 여자관계, 마피아 등이 공론화가 어려웠다. 재키가 죽은 후에야 그런 이야기를 다룬 책이 나왔다. 사람이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 신화가 된다. 저는 어릴 때 서울 사대문 안에서 자랐다. 당시 서울 중산층, 대체로 당시에 보수층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안 좋아했다. 서울에선 여당이 항상 선거에서 졌다. 1950년대, 60년대를 요즘 잣대로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것은 과거를 왜곡하는 면이 있다. 이승만 박사 시절에 진보당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박사를 요즘의 보수로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당시 미국의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보수인지 진보인지 어떻게 아느냐. 과거를 현대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인간의 본성이다. 또 진보 보수 이렇게 가르는 것이 어디서 시작했느냐. 기득권층 같은 용어를 써서 편가르기를 시작한 것은 진보쪽이 아닌가 한다. 갈등의 뿌리가 어디냐, 그런 용어가 어디서 먼저 퍼뜨려지고 대중에 각인했느냐 하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보수우파의 대승리?’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지금 정권은 철학도 없는 정권이고, 법과 원칙도 없고, 실패한 정권 때문에 차고 들어온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 미국도 그렇지만, 진보 정당이 국민의 인종적 구성, 젊은 층 문화랄까 그런 것 때문에 유리하다. 보수가 집권한다는 게 굉장히 어렵다. 2000년 미국 대선도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부시가 이긴 거 아니냐. 이명박 정부도 노무현정권이 실패하지 않았으면 집권하지 못했을 거다. 국민들이 전폭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 그 많은 기권표가 사실 잠재적 진보 표였다. 그 사람들은 등을 돌린 것인데, 2등과 표차이가 컸다고 자만해서 이 꼴이 된 거다.
전체 유권자의 30%의 지지 밖에 얻지 못한 대통령이 오만하고 건방졌으니 실패하는 게 뻔하다. 노무현 정권이 왜 실패했냐면, 사실 ‘부자를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자를 적대시하는 정치를 해서도 안 된다’는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일자리는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죽어도 일자리 못 만든다. 일자리는 부자가 만든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걸 무시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 정권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타깃을 만들었다. 그런 것이 엄청난 저항감을 얻은 것이다. 과도한 종부세 때문에 ‘압구정 거지’라는 말이 나왔다. 집만 있는 사람이 종부세 때문에 거덜이 난 것이다. 우리 학교 교수 중에도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가까운 반포에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교수들이 종부세 때문에 혼줄이 났다. 이런 사람들이 다 노 정권의 적이 된 것이다. 노 대통령도 첫 1년 임기 때 인기가 폭락했다. 어떻게 5년을 가겠냐고 했다. 2003년 가을에 해양수산부장관이 엉뚱한 얘기해서 물러나고 할 때 지지율 형편없었다. 그러다가 조순형 의원이 탄핵 발의했고, 그것이 국회 통과되어 후폭풍이 불어서 살아난 거다. 중반기 후로도 지지율이 25~35% 정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유증을 많이 남긴 대통령이다. 일단 여기까지 말씀드리겠다.




토론 3. 하승창
촛불 얘기부터 해보면 보수진영 혹은 우파가 인식하는 것처럼 촛불 때 뭔가 진보좌파가 재기를 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경찰이나 검찰 수사로 결과가 나왔을 거다. 정말 오랜 기간 수사하고 잡으려고 애를 썼으니까. 사람들이 촛불 배후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없다고 하면 다시 찾아오라고 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히려 진보진영이나 좌파 쪽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늘 운동권이 계획한 공간에 모이던 집회나 의사표현의 방법이 일순간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기획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광장에 나갔던 사람들이 보여준 기존 집단의 권위에 대한 불신을 오히려 확인했다. 정치세력이든 시민운동이든 다 안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거꾸로 우리가 일하는 시민운동단체에서도 우리는 뭘 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됐다. 그런 사람들의 인식이 보궐선거에서도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패자는 한나라당으로 확실했다. 그런데 승자는 확실하지 않은 선거였다. 민주당은 부평에서 이겼다고 좋아했지만 텃밭에서는 무소속이나 민주노동당에서 이겼다. 부분적인 승리들은 했지만, 확실한 승자는 없었다. 유권자들이 기존 정치세력이 누구도 지금 사태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를 미래지향적으로 끌고 갈만하다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요즘에 와서는 다른 양상이 보인다. 진보진영으로 결집하는 양상은 생겨나는 것 같다. 촛불 때도 없지는 않았다. 많은 기대가 있었다. 민생민주국민회의가 발족하기도 전에 발족한다는 기사가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에 실릴 정도로 기대가 상당히 컸지만 잘 안 됐다. 준비위원회 상태로 머물러있다. 현재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공간이 너무나 넓다고 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제각각이다.
민생민주국민회의 구상할 때 1987년을 많이 떠올렸다.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서 직선제로 모든 정당, 시민운동 세력이 다 모이는 것처럼.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더 다양해졌다. 의회로 진출해있고. 실제로 민생민주국민회의 내 정당간 조율이 안 되는 게 현실이고. 노무현 죽었으니 우리 입장을 다 접자, 이런 사람이 없다. 그런 점에서 전망은 제각각인데, 그 전망에 대한 공감대와 지지라는 것은 앞의 결과에서 보는 것처럼 전폭적인 신뢰가 있지는 않다. 사람들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거꾸로 비극적으로 돌아가셔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지금은 그의 단점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나 이런게 더 눈에 들어오고 현 정부에 대한 반작용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런 노무현의 가치를 포함해서 향후 전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다.
발제자가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대타협은 이쪽에서 하자고 하면 안 되고 이명박 정부가 하자고 해야 하는데, 잘 안될 것 같다. 대전환을 할지 여전히 의문이다.
인터넷 얘기도 하셨지만, 2000년대 이후에 크게 변화했다. 몇 년 안됐지만, 인터넷 발전이라는 게 거의 300년 전에 세계 변화와 맞먹는 지점에 와있지 않나. 구텐베르크 활자 인쇄술이 당시 중세사회에 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지배층의 경계를 확 허물어뜨리고, 근대사상이 발전했는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3권 분립이 실현되기까지 100여년 걸린다. 이렇게 없던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지금은 인터넷이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 전체의 지적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이 됐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현재의 정당, 정치체제 등에 상당히 균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지난 해 금융위기도 자본주의 세계를 재편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한반도 남북관계가 역전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전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른 지형으로 몰아가는 조건이라, 창조적인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 본다.
지금 좌우개념, 진보-보수 대립구도는 낡은 구도다. 대립과 과거를 설명하는 것이고, 제거와 배제로 많이 사용된다. 민주사회의 미래 담론에 방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어떤 집단의 어떤 그룹들이 창조적 혁신을 통해 비전을 만들어가게 될지. 지금과는 다른 사회세력, 정치세력을 만들어갈 것인지를 풀어가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 속에 희망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조 민 : 지금 진보좌파, 보수우파 모두 강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구조적으로 우파가 헤게모니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품위 있는 보수가 없다. 해방 전후 한국 현대사에서 보수주의자의 모범 사례는 드물지 않았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김병로(街人金炳魯) 선생을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내놓을 만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 분은 일제 치하 민족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일제 말년에 상당한 회유와 압박이 있었지만, 타협하지 않고 서울 근교 벽촌에서 닭이나 치면서 일제와 완전히 손을 끊었다. 해방 후에는 반공 자유민주주의자로 건국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친일 독재세력인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고 타협하지 않았다.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청렴한 본분과 지조를 지키면서 고결한 인품의 보수주의자로 한 평생 살다가셨다. 왜 이 분과 같은 딸깍발이 선비정신의 보수주의자의 맥이 그만 끊기고 말았는가?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는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근대화의 배타적 수혜집단으로 도덕성을 상실한 채 기득권을 향유하는 반공 수구세력으로 전락해버렸다.

포용력 있는 좌파도 없는 실정이다. 그저 비판, 반대만 하면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비판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은 다르다. 시민운동, 지식인 사회의 사고방식과 행위 패턴 그대로 국정을 담당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좌파는 많은 경우 말과 행동 즉,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회적 아젠다 선점, 치고나가는 데는 선수지만 뭔가 신뢰를 주는 데는 한참 부족하다. 진보가 30여 년간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했지만 경제적 헤게모니를 잡기는 어려운 구조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약자의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 분단구조로 인한 한국 사회의 특수한 정치지형을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해소해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진보나 보수나 서로 인정하고 관용할 수 있는 지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는 자유보다 평등 가치에 대한 지향성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는 좁은 국토와 과밀한 인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당히 자연스런 관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촌(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자조적인 말을 가끔 하곤 하는데,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한국인의 타고난 시기심, 질투심이라고 빈정거린다. 그러나 이는 틀린 생각이다. 근대화 이전 시기 촌락공동체는 빈곤의 공동체였는데, 해방 후에 누가 갑자기 일본서 돈을 보낸 삼촌 덕으로 양조장이나 정미소를 차리거나 논 열 마지기 쯤 사게 되면 하루아침에 공동체 내 역학관계는 깨지고 읍내 유지가 되어 군림하게 되는데 어찌 무덤덤해질 수 있겠는가? 지금 서울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평수의 아파트 값이 몇 배 차이가 나는데, 여기 누가 그러한 불평등 현상과 구조에 무덤덤해질 수 있겠는가? 강남의 집값이 올라가면 강북의 동의를 못받는 게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평등 가치의 지향성이 높은 것을 나는 ‘정치생태학적’ 조건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따라서 비록 보수파라도 우리 사회의 정치생태학적 특성을 이해한다면 형평성에 대한 가치 기준이 높은 국민정서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자유는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조건 속에서 강조되는데, 과거 해양제국 영국이나 땅이 넓고 세계로 계속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미국과 같은 앵글로색슨 전통에서 마치 천부인권처럼 여겨진 미덕이었다.

그런데 지나친 평등의식의 강조는 공동체를 질식시킨다. 자유 없이는 개인이나 기업의 개성이나 창의성의 발휘가 곤란하며, 사회의 발전도 없다. 따라서 ‘평등한 자유’ 또는 ‘자유를 위한 평등’ 이런 측면에서 상호성을 긍정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보수와 진보가 철학적 논의를 많이 해서 서로를 긍정할 수 있는 지평이 넓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 민주주의는 양면성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을 잘 활용했다. 현 대통령은 신문을 열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당구조 자체의 판 갈이가 필요하다. 과감하게 논의하면서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동안 언론들은 그 분에 대한 감성적 접근, 서민들과의 이야기 그런 부분만을 다루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의 정책적 부분도 냉철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윤여준 : 40여 년 전에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소설에서 ‘선의에 찬 우행은 악행으로 통한다’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동기가 좋다하더라도 방법론이 잘못되어 결과가 나쁘면 결국 악행이 된다는 것인데, 노 전 대통령도 그런 케이스 아니었는가? 그의 동기가 왜 국민적 집단의지로 승화되지 못했는가? 리더십의 문제였는가? 환경 때문인가? 조 박사님은 발제문에서 정당체제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을 수렴하는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서 건강하고 합리적인 공론창출이 어렵다고 하셨는데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시대가 끝나면서 국가의 영역이 쇠퇴한 자리를 독점자본과 보수언론, 특히 조·중·동 언론권력이 차지해서 시민사회의 건강한 공론마당이 형성되지 못했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노 전 대통령과 조·중·동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원인을 알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리고 인터넷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현재의 정부와 한나라당도 시민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인터넷 담당기구와 사람을 두고 있는데도 왜 소통이 잘 안되고 있는가? 네티즌 아닌 일반 국민과도 소통이 잘 안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제3의 대안세력을 말씀하셨는데 어떤 세력을 염두에 둔 것인지? 진보와 보수의 타협점에 초점을 맞추는 세력이면 대안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국민통합, 사회통합의 새로운 규범과 논리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요소는 무엇인지?
조 민 : 2004년 행정수도 이전 관련 정부 부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수도 이전을 통일과 관련해서 타당성을 개발해 달라는 주문인데 참으로 난감했다. 별 도움이 되지 못해 그 후로 불려간 적이 없었다. 수도 이전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 후 행정복합도시로 축소되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결국 서울과 충청 지방 간 묘한 지역갈등을 낳았고 국론을 크게 분열시켰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야당 모두 침묵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국력 소모인가... 당시 참여정부가 제시했던 정책안이 많은 경우 추진은 고사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뒤집어보겠다는 아주 대단한 꿈을 가졌다. 나는 그 꿈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급적, 물적 토대의 이해 위에서 치밀한 추진의지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심지어 많은 토론을 요하는 한국 근현대사 문제조차 정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꿈을 실행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와 기획이 나와야 한다. 정치적 꿈을 가진 사람은 나름의 기획력이 있어야 한다. 저항을 덜 받아가면서,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추진해나가야 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분이 가진 꿈과 실천 의지 사이의 괴리가 컸다. 꿈은 좋은데 조·중·동이 발목 잡았다고 했다. 남북관계도 그렇다. 의도는 아름답다. 그러나 핵문제, 대북인식, 한미관계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혼동과 갈등을 초래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인터넷 문화로 전통적인 민주주의는 질적 전환과정을 겪고 있다. 특히, 보수정치 세력은 인터넷의 공론 형성 메카니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인터넷의 공론 형성의 장을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보수정권이 국민과의 소통 의지의 유무를 떠나 이런 추세, 이런 흐름을 잘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3의 대안세력은 마지막에 말씀드리고 싶다.



플로어 토론
플로어 1.
저는 정치학을 공부했던 사람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보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가 된 것 같다.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할 사람들이 숙제를 안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한다. 언론에서 흔히 ‘진보, 보수’라는 말을 쓰지만, 어느 진영이든 기본적으로 반사이익을 통해 결집했다 헤어질 뿐, 플랫폼에 충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활동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양분해서 보는 게 별 의미가 없다. 하승창 위원장이 좋은 말씀하셨는데 촛불집회든 무슨 움직임이든 언뜻 보면 뒤에서 전략 전술을 만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보수든 진보든 어느 쪽 세력이든 차라리 투철한 생각과 논리로 사회를 휩쓸어 보겠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어느 쪽이든 어설픈 움직임뿐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작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이제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운영 방식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고 하지만 전 세계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폭풍을 만나 우리 사회를 어떻게 운용해갈지, 남북분단 상황처럼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요소까지 갖고 씨름해야 하는 상황에서 창조적인 혁신, 창의적인, 그러나 경험에 바탕을 둔 그런 그림을 그려봐야 하지 않나. 대타협이라는 표현은 좋지만, 양쪽 다 이념이 있고 전략이 있으면 대타협이 가능하지만 자기가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겠나. 여론의 힘에 밀려서 하는 것이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사회 모습 중에 민주주의 요소로 법의 지배도 말씀하셨지만, 우리 국민은 지혜롭다, 우리식 사회를 운용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는 ‘우리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법치주의는 편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하는데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비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국민들은 좋든 나쁘든 뭔가 균형을 찾아가는 정치생태적인, 건강한 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이러한 심성에 의미를 부여해나가야 한다.

플로어 2.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권위주의 청산을 주장했었는데 그 정책의 성과는 검사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든 것으로 시작된 것 같다. 조·중·동 언론 쪽에서 많은 공격을 했고, 막바지에는 국민스포츠라고 할 정도로 노무현 비판이 있었다. 저는 권위주의가 타파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광장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면 잡혀가던 시절이 있었다. 작년 촛불은 그런 트라우마가 없었던 사람들이 나가서 촛불을 든 것이다. 권위주의 체계 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용성스님과 독립운동 선언하신 33인 중에 한 분이신 만해 스님은 일제 시대와 해방 후에 불교계 내에서 정통성을 가지게 되면서 여러 스님들이 앞다투어 서로 제자라고 나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정통성을 쫓아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한국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선 동정적인 여론이 인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도 쉽지 않을 것이고, 진보 세력은 뭔가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면 갈수록 굳어지고, 새로운 사회 만드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혹시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더 경직되게 만드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요한 갈퉁 박사가 갈등 해결 단위에서 ‘트렌센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초월의 논리로 통합하는 거다. 남북문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진보․보수도 그래야 한다. 초월할 수 있는 가치,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현재의 갈등적 가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가 창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플로어 3.
조민 박사님에게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데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었다. 말씀 중에 보수․진보, 정치판에서 이런 말을 하는데, 과연 현실 속에서 그런 게 있는가. 이념적인 건 많지만 정책으로 승화한 것은 있는가. 별로 못 본 것 같다. 지난 시절 진보라고 하는 두 정부가 있었지만, 과연 진보정책을 폈는가? 현재 정부도 보수적인 정책을 과연 하고 있는가? 국가 정책으로 보면 일관성 있는 국정운영에 적용된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을 진정으로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참여정부에 기대했던 것을 거꾸로 MB정부에 기대하고 있는데 지금은 더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이 표현된 것이 촛불시위고 이번 노 전 대통령 추모 신드롬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회든 극단도 있어야 하고 보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가치가 있어야 생태적으로 안정적이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는 너무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 문제다. 상대를 제거하려고 해도 세포분열처럼 또 분화 확산된다. 반대파를 다 제거했다고 해도 획일적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서로 좀 인정해주는,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다. 학교 교육부터 이를 부정한다. 유치원부터 경쟁시켜서 혼자만 살아남아야 한다고 한다. 진보나 보수나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DJ 전 대통령이나 근본 기조는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경쟁의 가치 위에서 끌어왔다. 지금 정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진보 진영에서도 상대방을 인정하고, 경쟁보다는 조화의 가치를 추구하고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을 진보 개념이라고 보기 힘들다. 보수도 새로운 보수철학에 입각한 정책을 제안하지 못하고, 진보 정책을 깨부수는데 더 골몰했다.

플로어 4.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제 주변에서도 여러 가지 정치 보복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화가 일어나면 다 죽였는데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530만 표라는 큰 차이로 들어섰지만 지금은 지지율은 30% 미만이다. 하지만 마치 평생 권한을 부여받은 것처럼 행사하고 있고, 작년 촛불시위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보면서는 누구나 정부를 비판하지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뒤집어질지언정 권력을 잡은 순간에는 산성도 만들고 별 걸 다 만드니까 정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 촛불시위가 있을 때에 여론조사를 해봐도, 야당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특이하게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역전됐다. 작년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국민들이 촛불시위를 해봤자 정치적으로 모아지지 않으면 탄압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정치적 선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부분들이 이번 서거 정국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닌가 싶다. 노무현 전 정부는 결과적으로 여러 문제점도 많았고 사회 분열도 가져왔다. 그래서 집권 시에는 싫어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정치적 가치 자체는 필요한 게 아니냐, 그게 정치적 성과를 얻지 못하고 아마추어적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제3의 대안 세력이라는 건 전혀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세력에서 그 가치를 떠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 부분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오각성해서 할 수도 있고, 박근혜 대표가 할 수도 있고, 야당이 할 수도 있다. 임자가 주어져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는 종부세를 못 내는 입장이지만 정책 자체가 부자를 위한 정책이면 문제가 있지만 정책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하려고 했던 정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집단이 대안 세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 토론
박순성 : 역시 민주주의에 대해서 더 많이 고민해야할 것 같다는 말씀들을 하셨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제가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할 때, 방향은 두 가지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른가. 혼동하지 말자는 거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되겠다. 현대사회에서 시장 경제가 불가피하다는 것과, 시장경제에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본주의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도 고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조민 박사님이 추모 글을 가져오셨는데, 최근 언론에 나온 글을 읽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가 다 공감하는 내용이지만, 그런 공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왜 이런 균열이 생기는가 생각해보면, 실제적으로 그러한 내용이 구체적인 것은 전달하는 게 없다는 거다. 권위주의 청산 얘기하지만, 권위가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지, 권언유착, 지역감정해소 등등 다 얘기하지만 더 냉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최근에 어디서나 많이 듣는 얘기가 많은 분들이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낡은 틀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다고 한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부적절하다. 무엇이 진정한 보수이고, 진정한 진보인지, 좌파인지, 우파인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기존 틀은 다 엉터리야, 통합으로 나가야 돼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엄연히 갈등과 분열이 존재한다. 지식인들의 책임의식 방기라고 생각한다. 평등만 해도 수많은 철학적 논의가 서구에서 3-40년 간 진행됐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논의가 없다. 자유를 어떻게 평등하게 나눌 것인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균열을 바라보지 않고, 좌파-우파가 없다, 진보-보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엄연히 지배이데올로기가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균열을 봉합하고, 다양한 개인들이 공존하도록 해주는 게 정치이기도 한데, 이게 다 섞여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게 우리 사회다. 우리 사회를 보면 굉장히 평등주의적이면서도 이기적이다. 물론 우리 사회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겠다. 최근 제가 촛불시위 토론, 촛불시민의 정체가 뭐냐는 토론장에서 느끼는 답답한 것은, 촛불시민은 굉장히 다양한 사람이 나왔다. 정치적 편향성이 있는 사람도 나왔고. 대중 사회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옴으로써 사회적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 거다. 확인만 했지만,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기존 정치세력, 시민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표현한다. 사실 따져보면 차이점이 없다. 어떤 사람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어떤 사람은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그것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시민들의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모든 면에서 이중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신들에 대해 성찰이 필요하다.
두 가지만 말씀 더 드리고 싶은데 하나는 남북관계이다. 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보면 남한이나 북한이나 미국이나 모두 해결책이 없는 방향으로 간다. 북한은 부시 정부가 항복했던 것처럼 갈 거다고 생각하고, 남한은 이번이 아니면 길들일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책임을 안지는 상황에서 정책 대안도 내지 않고 확실한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과연 지금처럼 북한을 밀어붙여서 될 것인지, 북한은 강경일변도로 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북한 지도부에게도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모두 같이 죽을 수는 없다고 말려야 한다.
민생민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촛불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 자연히 해외자본이 빠져나갈 것이고 한국 자본도 빠져나갈 것이다. 안정과 분배의 문제가 최소한 한국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것이라는 빠른 각성이 있어야 되겠다. 현 정부의 몫이기도 하고, 기득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양보할 줄 아는 자세.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준비를 빨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돈 : 특별한 질문을 받은 건 없는 것 같아서 보완해서 말씀드리겠다. 흔히들 통합, 화해, 상생 이런 얘기하는데 위선적인 얘기다. 그때그때 선거가 결정하는 거 아니냐. 부동세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거 아닌가. 제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를 학교에서 보내면서 학생들을 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이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가 진보 중도 보수가 3대 4대 3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2대 6대 2가 된 것 같다. 중도가 많아진 것이다. 경제적 번영으로 진보나 좌파가 줄어든 것 같고, 반공을 중시하는 노년층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이것이 희망인 것 같다. 막연한 통합보다는 치열한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진보든 보수든 중도의 마음을 얻는 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 인종, 연령 등을 볼 때 보수 정치권은 한국에서도 어려운 면이 있다. 지금 정권 때문에 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조·중·동을 보수신문이라고 하는데, 이 신문도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보수를 그렇게 띄우지는 않았다. 이 정부 들어서 더 과대포장해서 키우는 경향이 있다. 그건 불안하다는 증거다. 조·중·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완전히 감정싸움이었다. 노무현 정권 때는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팔 아파서 못 살겠다”는 농담을 했다. 청와대에서 하루에도 그 많은 말을 쏟아내니 그에 대한 사설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논설위원들이 여성 문제, 소비자, 환경 문제 등을 쓸 기회가 없어졌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사설에 온통 정치뿐이었다. 또 하나는 노 대통령이 자충수를 너무 많이 뒀다. 대연정, 개헌 등 이런 것들은 굉장히 큰 문제인데, 이런 것들을 툭툭 던지니까 말이다. 보수신문과의 갈등은 노 대통령 자신이 자초한 면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들 신문이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 본선 때 과연 정도를 지켰나 하는 문제가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내가 절망하고 실망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상적 특징은 모든 면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너무 많이 넘었다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지방 분권화 등등 모든 정책 아젠다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모두 실패했다. 이런 것들은 어마어마한 사안들이다. 권위주의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는 권위주의 정부를 타파한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 자체를 파괴했다. 현 대통령은 그나마 남은 권위를 더 파괴해버렸다.
사실 요새 진보 진영, 보수 진영이니 하는 용어를 너무 쉽게 쓴다. 무엇보다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진영 문제에는 아예 침묵해 버린다. 민주당에서도 자기반성 한번 철저히 했다고 하다가 큰 코 다쳤다. 진보 신문과 민주당이 정동영 씨한테 “왜 출마 하느냐”고 비판했지만 결국 핀트가 어긋난 것임이 드러났다. 다원화된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분화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경색되는 것 같다. 추상적인 담론보다는 미디어 법, 4대강 정비사업 같은 것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요즘은 뭐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는 막막한 생각뿐이다.
하승창 : 행태는 똑같다. 냉전체제에서 국가들이 보여줬던 행태들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유독 남아 있는게 한반도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보수나 진보라는 게 고정화된 틀로 우리에게 있다. 고정화된 틀, 개념화된 몇 가지 요소들로만 보수 진보를 가름하는 사회적 인식 틀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회적 특정 세력이 지향하는 가치가 어떠냐, 생태적 가치에 기반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보나 보수 진영 둘 다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둘로만 나눠지지 않을 것 같다. 다원화될 것 같다. 그런 갈등이 있는 사회는 너무나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겠느냐. 그런 갈등이 있으면 큰 일 날 것처럼 하는 분위기가 이상한 거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 아닌가. 갈등을 어떻게 그 사회가 합리적으로 조정하면서, 굳이 이 표현이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관리하고 극복해 나가느냐... 갈등의 요소를 없애야 하는 분위기, 꼭 어느 한 쪽이 이겨야하는 분위기가 잘못된 행태를 닮아가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본다. 보수든 진보든 소통 방식에 접근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정당에 안 들어간다고 하는데, 개혁당처럼 많이 들어가거나 진보신당에 들어가거나,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면에 정당에 속해있으면서도 자기 정당을 못 믿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현재의 정당 구조가 우리 사회의 지향하는 가치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정당 구조가 이런 변화에 걸맞는 구조냐는 것도 따져 봐야하지 않나. 꼭 정당에 들어가야 정치를 할 수 있나, 꼭 정당이라고 이름 붙여야 하나, 꼭 그 안에서만 정치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그런 지점까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시스템이나 기제들이 포괄하고 있는 범위의 정도나 행태나 이런 모든 게 어긋나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런 점에서 양자 모두가 새롭게 창조해내야 하지 않나. 제도도 정당도 문화도 언론도 다 그렇게 새롭게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조직이나 문화가 자리 잡게 되고, 기존의 것을 뒤로 밀어내는 것이지 없애려고 하면 안 될 것으로 본다. 지겹고 낡아 보이는 것을 뒤로 밀어내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윤여준 :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급과 이데올로기라는 정당의 기반이 약화되고 인터넷 공간에서 개인이 직접 또는 NGO를 통해 공공정책을 형성해 활발히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20~30년 후에는 정당이 소멸될 것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심지어는 정치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조 민 : 대안논리, 대안세력이 나와야 한다. 현재의 정당체제로는 더 이상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다. 지금은 정당이 국가전략, 노동, 생태환경, 복지, 통일 등을 다룰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아주 중요한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 문제 등 정치사회적 현안을 잘 해결해야 하는데,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데 정당에 기대할 것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대안세력은 이념적으로 경직될 필요는 없고 국민들이 바라는 핵심 사안을 잘 포착하고 인터넷 공간을 통해 이런 문제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대부분의 국민 입장에서는 마땅한 지지정당이 없는 현실에, 아주 짧은 시간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역사적 모멘텀은 역시 대선 구도이다. 2012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2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가의 정치지형이 요동치는 해로, 북한은 이 해를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로 선언했고, 우리의 대선, 미국 대통령 재선, 중국의 후진타오체제에서 시진핑체제로 지도체제 전환, 그리고 러시아 대선 등 한반도 주변국의 정치 변화가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국내외적인 정치 변동기에 한국은 통일을 준비하고 민족사회를 이끌어갈 역량있고 미래지향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지금부터 3년의 기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세력이 나와야 한다. 많은 사람은 필요 없다. 우리 사회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해서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때, 열 명 정도만 모여도 주목을 끈다. 어느 정도 역량이 갖추어진 사람들, 국민의 바람과 공동체적 가치를 포착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내키지 않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기존 질서의 장벽에 한계를 느낄 필요가 없다. 역량을 갖추고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도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대안 모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윤여준 : 시간 관계상 북핵문제는 다음 기회에 합시다.
박 교수님이 ‘평등’ 문제를 말씀 하셨는데, 작년 9월에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임원 몇 분이 노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서 대담한 내용을 읽었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이 그 자리에서 “내가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는 평등이다”고 말했다. 기회의 평등인지, 조건의 평등인지, 결과의 평등인지 어쨌든 ‘평등’의 구체적인 내용 설명은 없었다.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노 전 대통령은 “자유라는 것은 지배로부터의 자유, 즉 불평등한 구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므로 평등은 자유의 전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수 세력이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불평등한 기득권을 옹호하는 지배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이런 평등관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가?
이제 ‘노무현 신드롬, 노무현 신화, 노무현 가치, 노무현 모델’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어제 아침 중앙일보에 실린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칼럼에 ‘노무현 모델’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김 교수는 “‘노무현 모델’이란 노정부가 추진해 온 포괄적인 사회발전 전략을 지칭한다”면서 “노 정부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의 민주화, 국가 균형발전, 선진통상국가, 인권을 포함한 사회민주화, 사회복지 강화, 한반도 평화정착 등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노무현 모델’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다.
박순성 : 평등에 대한 논의는 좀 어렵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씀에 대한 윤 전 장관님의 해석이 참 좋습니다. 결국은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국가의 과제이다. 그런데 흔히 자유라고 말할 때, 그 자유는 기존의 구조에서 각자 가진 힘을 자유롭게 쓰는 거다. 그런데 불평등한 구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함께 강조하게 되면, 또는 평등한 자유를 강조하게 되면, 실제로는 자유와 평등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한편, 구체적으로 무엇을 평등하게 나눌 것인가,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등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100명 살고 있는데, 무엇인가 나눌 수 있는 것을 99명이 각각 1을 가지고 1명이 100을 가져 사회 전체가 199 단위의 무엇인가를 가진 사회에서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99명이 각각 100을 가지고 1명이 1을 가지는 사회 전체적으로 9901 단위의 무엇인가를 가진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여러분들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만약 양 극단에서 조금씩 좁혀서 30명이 각각 1을 가지고 70명이 각각 100을 가지는 사회, 아니면 70명이 각각 1을 가지고 30명이 각각 100을 가지는 사회, 어느 사회가 좋을까? 판단이 어렵다. 나누어가질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복잡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과제이다.
‘노무현 모델’을 노무현 정부 때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한계는 위원회정치와 관료정치 사이의 괴리, 그리고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와 일치하지 않은 정책의 추진 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모델을 지금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균형 발전의 사회, 이 두 부분을 노무현 정부가 내걸었지만 실제로 정책은 거꾸로 갔다. 평화와 동북아 정책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노무현 모델’에 기초해서 노무현 정부의 업적에 대해 평가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하승창 선생님이 좋은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가치 논쟁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가치논쟁을 해야 점점 좁혀질 거라고 생각한다. 시민정치와 운동정치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정치가 많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문제를 제도정치에 다 떠넘기는 것도 옳지 못하다. 서로 협력하고 결합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윤여준 : 아까 말한 김호기 교수의 칼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추모에 참여했던 기억이 우리 의식에 생생히 살아있음으로써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추모열기가 이른바 기억의 정치로 전화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라는 대목은 지나치게 신화화 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박순성 : 우리가 개인사에서나 집단사에서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려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미래지향적인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 시점에서 현재를 볼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문제를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억을 해야만 탈피할 수 있으니까 ‘기억의 정치’라는 말은 ‘반성의 정치’이기도 하다.
하승창 : 특별히 더 드릴 말씀은 없다. 칼럼 말씀을 하셨는데, ‘노무현 모델’, ‘기억의 정치’ 등에 대해서 우려할 점은 있다고 본다. 추모열기라고 하는게 전폭적인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냐,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걸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구별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담론이 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우리 사회에서 그의 가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친노쪽의 지겨운 주장처럼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추모열기가 노무현의 정치활동의 지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돈 : 오히려 노무현 정권 하에서 자유주의 담론이랄까, 그런 것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보수주의다운 보수주의가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에 처음으로 나왔던 것인데, 그런데 지금 그것이 도매급으로 다 망가진 거다. 그게 제일 아쉽다.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시장주의, 경제적인 자유 같은 담론이 오히려 그 때에 활발히 논의됐다. 자본주의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은 확인된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의 담론이라는 게 사실 진보 쪽에서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도 거기서 만들어내고 전파한 것이다. 나는 농담으로 우리나라에서 3대 미신이 있다고 말한다. 기득권, 서민, 위화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영어로 번역이 안 되는, 한국에만 있는 용어다. 누가 기득권이냐, 서민이라고 할 때 누가 서민이냐? 언젠가 TV에서 3천만 원 대의 기아 쏘렌토 타는 사람이 기름 값이 올라서 우리 같은 서민이 못 살게 됐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이 서민이가? 나는 2천만 원 대 자동차 외에는 타본 적이 없는데, 대학 교수가 서민이라고 말하면 몰매를 맞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참여정부 때는 보수담론이 있었는데, 오히려 현 정부 들어선 그런 것이 흘러간 옛노래가 됐다.
박순성 : 우리는 신분이나 노예제도의 상속에 반대한다. 귀족적 상속은 반대하는데 왜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속은 찬성하는지. 그 논리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다시 말해 신분의 상속은 반대하시는데 재산의 상속은 찬성하시는지?
이상돈 : 상속세가 좋지 않은 세금이라는 데 대해선 많은 논의가 있다. 상속세가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루스벨트 때 세율이 높아진 것이다. 상속세는 부작용이 많고, 징수 관리에 과다한 비용이 든다. 또 상속세와 법인세가 적은 나라로 자본이 도피하게 된다. 삼성 같은 큰 재벌이 상속 못하게 하면 결국 해외펀드가 회사 지배권을 갖게 될 뿐이다. 상속세가 경제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논의가 노무현 정부 때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다.
윤여준 : 박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는 교육, 즉 사교육비가 제일 예민한 문제인데 아이에게 투입하는 부모의 재력에 따라서 그 아이의 미래의 수입이 결정되기 때문에 부와 빈곤의 세습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닌가? 양극화가 심화되는 추세 속에서 빈곤의 세습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면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 없이는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박 교수님 말씀이 한국사회가 당면한 핵심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상돈 : 그런 논의를 촉발하는 집단은 모럴리티에서 정당해야 한다. 감세와 상속세, 증여세 폐지를 제일 처음 논의할 사람은 1920년대에 미국 재무장관 지냈던 앤드류 멜런인데, 거부였다. 멜론 뱅크, 알 코아, 걸프 석유 등을 가진 재벌이었다. 장관 시절에 세금을 낮추고, 상속세를 낮추어야만 자본 축적이 되고 그래야만 투자가 생긴다는 소신이 있었다. 루즈벨트가 집권 후에 멜런을 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흠잡을 데가 없었다. 멜런은 은퇴한 뒤에 자기가 모은 미술품 컬렉션과 함께 워싱턴 DC 내셔널 미술관 만들어서 국민에게 헌납했다. 우리는 미술관 만들어서 절세하는 방법으로 쓰지 않는가. 여기서 차이가 난다.
조 민 : 국민통합은 중요한 문제다. 국민 지지 위에서 정부의 설득 기제가 작동되어야 정책 추진이 가능하다. 특정한 이념에 경도된 정치세력이 집권하면 반대파는 맹목적인 거부로 국가 목표 달성이나 정부 정책의 효율적 추진이 어려웠다. 교육, 복지 분야 다 그렇다. 상호 접점을 확인하고 확대해 나가야 한다. 2009년 현재 상황은 분열의 정도가 상당히 심하다고 본다. 이런 상태의 악화를 막고 좀 더 균질성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보수 기득권층은 탐욕스럽고 전혀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좌파는 점차 제도화되고 기득권화되어 가면서 이미 초기의 청신함을 잃었다. 자파의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신구 기득권 세력이 서로 양보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판국에 비정규직, 청년실업 문제, 산재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풀릴 까닭이 있겠는가. 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얻고 국민을 설득하면서 이렇게 맞물린 국면을 풀고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터놓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통일을 앞두고 있다. 통일을 향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가 없다면 통일 추진 자체가 어렵다. 더욱이 통일 후 내적 통합 즉, 국민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깨지게 된다. 그런데 통합으로 나가는데 상호 양보를 통한 접점도 필요하지만, 보다 창의적인 논리가 없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벽에 부딪힌 논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운영방식을 우리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역학관계 속에서 우리식으로 한번 운용해보자는 거다. 지금 ‘경쟁’이 마치 최고의 미덕처럼 강조되고 있는데, 정말 경쟁만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보장하는가... 어느 면에서는 경쟁보다 협동과 상호성이 더 높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가져올 수 있고, 바깥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더 좋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10년, 20년 이상 경쟁, 효율, 생산성 이런 가치들 속에서 사회운영과 사회조직의 원리를 이에 맞도록 뜯어 맞춰왔다. 이제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러한 가치, 이러한 삶의 방식들을 재고해 볼 때가 아닐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시장경제, 우리 모두 함께 하는 동반성장의 길을 말해 보자. 사회운영의 원리와 방식에 대해 새로운 논의를 시작해보자는 말이다. 우리 국민들이 “바로 그거야, 우리가 그런 걸 꿈꾸어 왔어” 하고 맞장구 칠 때, 대중의 희망과 지지를 잡아끌 수 있다. 대안논리를 찾고 대안그룹이 형성될 경우 제3의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바로 이 길이야” 라고 이야기 하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나설 때, 우리는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
윤여준 : 빈소나 분향소를 찾아 직접 조문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그 분이 추구했던 ‘평등’이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마음속에 각인하는 계기가 됐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시장경제의 효율성이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어떻게 ‘평등’이라는 가치와 조화시키고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 다 같이 함께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오늘 다루고자 했던 두 가지 현안 중 ‘북한 핵 문제’는 시간 관계로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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