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 순행(巡幸)은 1907년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대한제국 황태자가 지방을 순행(巡幸)하며 통감부가 대한제국 침략이 아닌 대한제국의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하고 있고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일제 통감부의 강박)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 즉위(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이토 통감이 황제 양위로 둔갑)를 홍보하는 이벤트였다. 조선 국왕도 도성 밖을 나와 행차하는 경우는 능행(陵幸), 원행(園幸), 온행(溫幸) 정도였고 한성에서 멀지 않은 경기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서북지방으로 순행(巡幸)했던 국왕은 없었으므로 대한제국 황태자의 서북 순행(巡幸)은 전례가 없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에 의해 비밀리에 계획되었다.

대한제국 황태자(순종 융희제)는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統監府)의 간계(奸計)로 1909년 1월 27일부터는 서북지방으로 순행(巡幸)했다.

약 1주일간의 예정으로 개성을 거쳐 평양과 신의주 등을 순행한 황태자는 2월 3일에 한성으로 돌아 왔다.황태자의 서북 순행(巡幸) 시 일제가 강요한 일본 국기 게양에 대해서 대한국인들은 극렬히 반대하였고, 특히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지방에서는 대대적인 일장기 거부사태가 일어났다.

평안도 의주군에서는 일반 국민과 학교에서 일장기를 달지 않기로 결사항거하였고, 관찰사와 부윤 등이 순사(巡査)들을 보내어 위협하면서 일장기를 억지로 내걸게 하였으나 큰 저항에 부딪쳤다. 일장기 게양에 앞장 서서 반대한 비현면의 극명학교(克明學校) 교사인 이정근, 박형권 두 사람은 신의주경찰서에 잡혀가서 무수한 악형을 당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서북 지방 대한국민이 모두 '우리 머리 위에는 5천년 창창한 역사이래 변치않는 대한제국의 하늘을 이고 있고, 우리 발아래에는 4천리의 대한제국 땅을 밟고, 두 눈에는 대한제국의 해와 달을 우러러 보며, 몸에는 대한제국의 비와 이슬을 맞는 대한국민으로, 금일 우리 황태자(皇太子) 전하께서 우리 지방을 순행(巡幸)하사 우리 민정을 두루 살피시는 이 때 우리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만 달리라'하고 '대한제국 만세'의 외침이 길게 울려퍼지니, 단군유도(檀君遺都;평양)에 하늘의 해가 다시 밝고, 동명고사(東明故祠;동명성제의 사당)에 초목이 다시 봄을 맞음이니, 장하도다 동포의 정신이여! 개성에서 시작하여 의주에서 그치니 무릇 1천여 리 사이에 대한국민이 의논하지 않았으되 한 뜻을 이루어 서로 통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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