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러들었던 나무와 풀들이 기지개를 켜고 새 싹을 돋아내는 봄철을 가리켜 여인의 계절이라고 부르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철은 남성의 절기라고 하던가. ‘봄 처녀’라는 노래는 ‘하얀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은 아가씨를 극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며 봄 여인을 칭송한다. 그래서 봄만 되면 청첩장이 쌓이는가. 짝이 있어야 결혼식을 올리게 되니 구태여 여인의 봄만 택할 필요가 없다.

가을에도 수많은 처녀·총각이 제짝을 만나 시집 장가를 간다. 요즘에는 30도가 넘는 여름더위에도, 영하 20도에 가까운 혹한의 겨울에도 혼인예식이 그치질 않지만 아무래도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봄·가을이 결혼식 올리기에는 제격이다. 과거의 결혼식은 대개 신부 집 마당에서 차일(遮日)을 치고 거행했다. 신랑은 사모관대로 치장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초례청에 섰다.

신부는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를 머리에 얹은 모습으로 부축을 받으며 들어선다.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기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숙였지만 가끔 눈만 들어 신랑 생김새를 훔쳐본다. 신랑·신부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주를 주고받은 부모님들이 혼사를 결정했다. 한국인이 최초로 미국에 이민을 갔을 때 대부분 하와이 사탕수수 밭 일꾼으로 갔다.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자 중에는 총각이 많았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결혼을 서두른다. 코 큰 미국 아가씨를 데려올 형편은 안 되고 사진을 찍어 모국으로 보내면 사진으로 선을 본 다음 배에 태워 신부를 하와이에 보냈다. 사진결혼이다. 우리 민족사에 또 하나의 비극인 사탕수수 밭 노동자 이민이 이제는 1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려 300만의 교민이 미국에 거주한다. 그들의 능력은 미국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세탁소나 리쿼 스토어로 시작하여 전문직이나 정계에도 발을 딛는다. 미국의 주류(主流)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이민 1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 2세, 3세를 거쳐 지금은 젊은 4세들이 떵떵거린다. 새로 이민 가는 사람들도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이 결혼을 통하여 지평을 넓혀가고 있지만 옛날식의 전통의례는 사라졌다. 대부분 결혼 예식장에서 혼인을 맺는다. 서울 거리에는 어디를 가나 호화스러운 예식장들이 엄청나게 큰 구조로 맵시를 뽐낸다.

성균관이나 서울하우스에서는 가끔 전통혼례가 거행되는데 외국인들도 간혹 전통 의례를 치른다. 헌칠한 키에 한복을 받쳐 입은 모습이 보기에 귀엽다. 한국에서 맞이한 아가씨에게 한국의 전통의례로 서비스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많은 신랑·신부는 하얀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어느 식장을 막론하고 그 순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나마 요즘에는 장난꾸러기 신랑 친구들에 의해서 이벤트가 행해진다.

혼례의 초종절차가 다 끝난 후 신랑·신부 행진시간에 벌어지는 이벤트라 주례도 꼼짝 못하고 구경만 하게 된다. 신랑 신부에게 “사랑합니다.”를 세 번씩 외치게 하고 뽀뽀를 하도록 명령한다. 신랑 신부야 공개적인 뽀뽀가 부끄럽게도 느껴질 법한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다. 스스럼이 없다. 신랑의 힘을 봐야 한다고 하면서 팔굽혀 펴기도 시킨다. 한바탕 웃음꽃이 벌어진 다음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과연 신세대다움을 느끼게 한다.

3월12일은 마침 토요일에 모처럼 화창한 봄날이다. 등산도 못가고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뜻밖으로 주례가 신랑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다짐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신랑은 현직 판사이고 주례는 스승인 민모 대법관이다. 그는 20여분 동안 긴 주례사를 읽었지만 중간 중간 유머를 섞어 지루하지 않게 진행했는데 금연을 약속받는 것으로 부족했던지 미리 준비한 서약서를 꺼내어 신랑으로 하여금 낭독하게 만들었다. 하객들은 즐거워한다.

이로서 신랑은 양가의 부모님과 친지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신부 등 체면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모든 하객들 앞에서 단연(斷煙)을 서약했으니 새로운 신부를 맞이한 기쁨은 좋지만 기호(嗜好)인 흡연권은 박탈당한 셈이다. 필자도 많은 주례 경험이 있고, 하객으로 참석한 것도 부지기수지만 건강을 주제로 한 금연문제를 결혼식장에서 주례의 권위로 다짐받는 장면은 아주 신선했다. 민 대법관의 센스가 엿보인다.

더구나 담배회사에는 미안하다는 덧붙임까지---. 흡연자들의 설 곳이 마땅찮다는 시중의 여론도 있고, 흡연권을 외치는 애연가들도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시대의 조류는 담배를 건강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6.25당시 초등학교 시절에 담배를 배웠던 나는 1년쯤 지난 후 아버지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 6학년 때 끊었다. 간접흡연이 더 나쁘다는데 지금도 연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건강에 가장 나쁜 것이 담배라니까 모두 금연자가 되면 좋겠지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다. 다만 주례의 당부를 받고 만인 앞에 서약한 판사 신랑만은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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