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적인 착상을 시작한 이래 추구해온 가장 이상적인 제도가 있다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데올르기라는 것도 어떤 제도가 인류를 더 자유롭고 평등한 토대위에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역사의 원동력인 노동과 잉여가치를 평등하게 분배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기치아래 공산주의가 등장한 것도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제도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산주의의 실패에서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한 알렉시스 토크빌은 “자유의 창가에는 평등이 저 멀리쯤 보이지만 평등의 창가에는 자유도 평등도 모두 보이지 않더라.” 고 하여 지상 평등주의인 공산주의의 몰락을 미리 예견하기도 하였다.

자유가 만연되면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어 자연스럽게 불평등이 심화되기 마련이다. 원시시대에서도  산에 있는 토끼를 능력껏 잡아서 가지라고 하면 아마 날렵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다 잡아서 독식을 하게 될 것이다.  나머지 몫이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불평등을 호소하게 될 것이고 다수의 여론에 의하여 결국 분배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와  게으른 자가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파이가 줄게 되면 다시 평등을 제한하고 자유를 확대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자유와 평등은 상호 충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서구의 민주주의 발달과정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시대환경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이동하는 것을 엿 볼 수가 있다.  파이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복지와 형평을 우선시하는 좌편향적인 정부가 등장하게 되고 지나치게 복지를 확대하여 국가나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되면 어김없이 우편향적인 보수주의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자유경쟁과 개방은 우파 보수주의에 가깝고  보호주의적 성격을 띠는 평등은 좌파 진보주의가 선호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20세기 초 전체주의의 환상 역시 인간성 회복운동으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이름 하여 마르크시즘이라 부르는 평등주의 횃불은 거대한 산불처럼 온 천지를 불게 물들이며 요언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 조차도 공산주의의 평등이론은 인류보편의 가치가 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상호 공존의 질서를 만들어 보자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소련의 세계 공산화로의  팽창전략은 한반도 적화를 통해 일본을 겨냥하고 더 나아거서는 미국까지도 목표를 삼은 것이 분명하였다.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다 미사일 기지까지 설치하여 미국을 위협 하려고 시도한 후루시쵸프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목격하고 (히피, 마약사범, 지하경제, 빈부격차, 인종 문제, 총기사고 등) 머지않아 미국전역에서 노동자 농민들이 주축이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유의 미국은 건재하고  평등의  소련은 무너지고 말았다.

평등에 입각한 분배의 매력은 결국 사민주의로 개량이 되었으나 생각보다 짧은 수명을 다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99년 좌파정부의 수반격인 블레어와 슈뢰더가 쓴 아래 반성문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첫째: 우리는 창의성과 다양성대신 보편성과 평등을 사회정의로 착각했다.

둘째: 사회 정의를 정부지출로 달성하려 했다.

셋째: 권리를 의무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넷째: 정부의 역할을 과대평가했다.

다섯째: 시장의 약점은 지나치게 부각했고 장점을 과소평가했다.

뒤늦게 뉘우친 블레어가 보수주의 실용노선으로 전환하자 그의 지지자들이 대처의 철가방을 든 배신자라고 조롱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영국 경제를 유럽에서 가장 활력 있게 끌고 간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와 같이  노동자 농민들의 지지로 집권한 좌파의 수장들이 국가경영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주의로 전향한 사실을 놓고 대한민국의 좌파 이론가들은 이념의 다양성 시대라고 변명에 급급해 왔다. 특히 이념으로 분단된 처지에서 중도좌파 중도우파 개혁적 보수 개혁적 진보등 정치학 사전에도 없는 해괴한 용어도 모자라서 뉴라이트 올드라이트 까지 등장하는 정치철학의 홍수사태가 나고 말았다. 

지난 87년 6.10 항쟁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좌편향적인 사회분위기 즉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역행해온 제도와 법령을 정비하여 선진 한국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이명박 정부까지 나서서 무슨 중도 강화를 들먹이면서 겉멋을 부리려 하고 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한 일이다.

대한민국과 같은 특수한 정치현실에서 중도가 끼여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진실이다. 국가보안법, 미군 철수 및 한미동맹, 한미 FTA, 북한의 핵무기, 상호지보금지, 의결권 제한, 금산분리법등의 다양한 아젠다가  선택의 문제이지 중간에 절충 할 여지가 없는 사안들이다.   특히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과 체제를 지키고자하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는 상태에서 중립을 취하고 있는 것은 결국 반체제 저항 세력을 편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처럼 남북이 이념으로 대치하고 있지 않은 서구사회에서도 국가주의를 배격하고 시장의 기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가  미래의 생존전략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데 국가지도자들이 무었을 보고 배우는지 한심하다.  정책이나 시대정신은 공산주의의 환상처럼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선택의 일종임을 왜 들 모르고 있는지 땅을 치고 통곡 할 일이다. 




남북이 이념으로 분단이 되어있는  특수한 정치여건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것은 휴전선 한복판으로 청와대를 옮겨놓고  양쪽 대통령을 다 할 테니 나한테로 모이라는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탈이념이란 이념자체를 극복할 국정 아젠다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겉멋으로는 절대로 국민을 설득할 수가 없다. 과거의 박정희 대통령처럼 단순하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그 한마디에 전 국민이 뭉쳤고 정치적인 주권행사도 유보하는 희생도 감내 하였다. 




우파 보수정권에서 좌파의 속임수인 중도 강화론을 들먹이는 것은 정치적 자살골이나 마찬가지다. 좌파들은  중도 통합이니 개혁적 진보니 하면서 그럴듯한 포장을 하여  국민을 속여 왔지만 우리 우파는 대부분 역사의 정의를 위해 싸우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손자  병법에서도 我生後 殺他라 하여 우리의 성을 견고하게 해놓고 백병전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색깔이 모호한 처신은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가 다 달아나 버리는 패착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제 두고 보면 알겠지만 10월 재보선 내년 지방선거 지리멸렬하여 식물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역사의 장애물인 좌파 청산은 하나도 못하고 좌파들에게 다시 정권을 내어 줄지도 모르게 생겼다.  대통령의 지지도란  확고한 정체성 굳건한 국가관 변함없는 신념이 있어야  회복이 가능한 것이지 소신도 없이 중간지대에 안주하고 있는 회색분자들을 의식하해서 엉뚱한 행보를 하는 것은 국정에 아무른 도움도 되지 않는다.




  비록 소수지만 확고한 지지층이 건재하고 그들의 시대정신이 분명하면 나머지 중간지대의 회색분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자정권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은 물이 차면 넘쳐서 바닥을 적시는 trickle down 이라는 경제이론 하나이면 좌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




선진 의회민주주의 영국에서도 대처수상은 노동자  농민의 지지는 원치 않는다면서 탄광노조를 탄압하여 쇠락하는 영국경제를 소생 시킨 것처럼 임시 욕을 먹더라도 확고한 선택을 바탕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상이다.




1979년도 아일랜드의 다수야당의 좌파지도자 앨던듁스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등을 돌리고 소수여당과 결탁하여 법인세를 인하하고 임금 상한선을 법제화하는 그 유명한 탈라합의를 도출하여 노숙자와 시위천국인 나라를 땀 흘려 일하는 나라로 변화 시켰다.   다음 선거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배신자라 하여 낙선을 시키고 말았지만 지금은 절망의 땅을 구해낸 구국의 영웅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역사와 대화 할 수 있는 인물이 진정한 정치가이지 나라의 대통령이 졸장부처럼 측근이나 챙기는 정치꾼이 되어서는 모두가 불행해진다.




다소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국부를 늘려 선진화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분배를 더 가속화해서 그 활력으로 총화 단결하여 선진대열로 갈 것인가 하는 양론은 분명히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우파 정부란 지난 좌파정권과  차별화한 정강정책을 바탕으로 선의의 경쟁을 함으로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원칙이다.  이념의 공동체여야 하는 정치권력이 좌고우면 하는 것은 영혼 없는 정치나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답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답게 선을 분명하게 하면 분명히 승부가 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의 합의로 선택한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은 국가경영의 최대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한가하게 선택의 여지가 매우 협소한 것이 문제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이를 키워 선진화의 토대위에서 통일 즉 영구분단을 막아내야 하는 절제절명의 과제가 부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세계의 석학들이 아시아권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선진국 진입이 가장 빠른 나라로 우리를 지목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중화학 분야를 비롯한 산업의 기반시설이 전무한 싱가폴 홍콩 대만 등 경공업 분야의 나라에게 조차 보기 좋게 추월당한 원인은 좌편향적인 이념지형이 지나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우리가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내부 갈등을 자제하여  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가동 했더라면  적어도 지금은 4만불 불의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다.  친북 좌파세력들이 직업적으로 체제 저항운동에 투신하여 귀 여린 노동자들을 자극하고 국민을 선동하여 성장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하여 분규를 조장하고 투쟁한 좌파 운동권들이 아무른 반성 없이 여야 정치권에 진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다시는 시대를 역행하는 좌파들이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제일의 사명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금 좌파들은 지난 10년간의 실정과 노무현과 그 측근들의 부패로 인하여 관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노무현의 승부수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게 생겼다. 이렇게 좌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정신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중도 타령을 하고 있을 한가로운 시기가 절대로 아니다.




 지금의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도약하느냐 아니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해버린 남미처럼 되고 말 것인가는 현 정권의 어께에 지워진 짐이다.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한 나라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정치적 포퓰리즘이 원흉이다. 이명박 정부가 좌파들의 전유물인 포퓰리즘을  답습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무른 실천 계획이나 목표 설정도 없는 중도 실용아란 술에 물탄 것이나 진배없다.  얼치기 좌파 출신 측근들을 한시 바삐 몰아내고 이념적인 코드로 진용을 새롭게 편성하는 국정쇄신이 화급을 다투는 일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명박 정부는 시대를 역행한 좌익들과 사활을 걸고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조국의 불행한 현실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서울 특별시 애국단체 총협의회

6.25 바로 알리기 국민운동본부

상임의장 김병관 ( 전서울시 재향군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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