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에 매일처럼 일기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담임선생은 친절하게 일기 쓰는 요령도 가르쳐 주셨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 자기가 한 일을 그대로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같은 반 친구들의 일기가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똥 쌌다.” 뭘 쓸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일기를 검사한 선생님이 천편일률적인 일기를 읽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겠지만 그렇게라도 글 쓰는 버릇을 익혔으니 다행이었다.
 
일기는 대부분 자신의 기록이다. 우리가 아는 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7년에 걸친 왜적과의 싸움과 원균의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하는 장면까지 세세히 기록한 역사적 유물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따라갔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중국인들과의 교유를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박지원은 외교관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했지만 같은 시대의 김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는 처절한 신음소리를 감당일기로 썼다.

조선 정조시대의 무관 노상추는 당파싸움 때문에 양반이면서도 문관이 되지 못하고 무관으로 출세해야 했는데 그 서러움을 68년간 끊임없이 기록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일제의 강압시대를 살았던 인물 중에서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를 끌어온 거인이다. 그는 독립운동의 산 역사다. 그 기록이 백범일지(白凡日誌)다. 후인들은 이를 읽으며 그의 애국심과 임정요인들의 풍찬노숙하는 실상을 알게 된다.
 
양우조와 최선화는 독립운동을 함께 한 부부간으로 8년 동안 ‘제시의 일기’를 썼다. 중국의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으로 옮겨 다닌 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상세히 기록하여 독립운동의 역사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시의 일기는 조국광복과 함께 귀국하면서 기록이 중단되지만 그들의 외손녀 김현주가 1999년에야 출판하여 세상 빛을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출판부수가 너무 적어 많은 이들이 이 일기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나치의 압박을 피하여 2년 동안 다락방에 숨어 살다가 밀고에 의해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죽어야 했던 안네 프랑크가 남긴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줘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용케 살아난 아버지가 딸의 일기를 세상에 내놨는데 영화 연극 등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며 지금도 서점에서 책이 팔리는 정도다.
 
이처럼 널리 알려진 일기들 말고도 주옥같은 문학작품으로 남은 일기들이 수두룩하다. 일기가 개인기록이면서도 사색과 고민 그리고 신념과 철학 등이 녹아 있어 후세에 큰 경종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4.19혁명과 소녀의 일기’를 펴낸 이재영의 일기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4.19 당시 여고 3학년에 불과한 어린 여학생이다. 3.15부정선거가 실시될 때는 학기가 4월에 시작할 때라 2학년이었는데 일찍이 웅변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큰 꿈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그만큼 성격도 활달했다. 당시 여학생은 한없이 나약하고 힘없는 존재일 수도 있었으나 이재영은 이러한 선입관념을 깨고 과감히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정치에 저항하게 된다.
 
그것은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의 죽음과 관련된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조병옥이 뜻밖에도 암이 발생하여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수술 끝에 숨지고 만다. 비보를 들은 국민들은 자유당을 대신할 유일한 인물을 잃은 슬픔으로 전국이 통곡한다.
 
이재영 역시 어린 몸이면서도 빈소를 찾아가 혈서로 조문을 드린다. 당시 걸핏하면 혈서를 쓰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재영도 그 대열에 낀 셈이다. 그러나 여학생의 혈서는 매우 드문 일이어서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이재영의 혈서투쟁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혈서를 쓰는 등 매우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바늘에만 찔려도 두 손을 싸매고 죽는 시늉을 다할 나이에 스스로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자신의 신념을 피로 기록한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싹수가 보였다고 할만하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재영의 혈서소식에 “어린 여학생까지 혈서를 쓰다니 슬프지 않을 수 없다”고 현실을 개탄했다. 이재영은 3.15부정선거의 날 일기에서 “아!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이여! 하늘이여!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저희들은 힘이 없나이다. 권력과 무력 앞에 국민은 힘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맨 주먹밖에 없습니다!” 라고 절규했다. 마산에서 쏟아지는 총탄세례 앞에서도 의젓했던 시위대가 김주열을 비롯해서 12명이나 희생당한 참상 앞에서 소녀는 맨 주먹으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4.19 당일에는 “정의의 화산이 폭발하는 날! 민주화를 불러오는 신호탄이 발사된 날! 전국의 국민들이 하나로 뭉쳤던 날! 젊은 청년학도들이 거리에서 독재를 무너뜨린 날! 200여 명의 사망자와 1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날!” 이라고 기록한다. 이재영의 일기는 당시 썼던 일기를 토대로 구성되었다. 4.19혁명문학은 시(詩)가 대부분이다. 일기체 기록은 처음이다.
 
이재영만이 가진 끈기와 기록보존 그리고 네 아들의 뜨거운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더욱 정진하여 4.19와 맺은 피의 인연을 오래오래 빛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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