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추종자들이 내걸고 있는 공적을 보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인물이라는 점이 첫째다. 과연 특정인물이 나라를 건국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대체적으로 어느 집단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지도자가 있다. 지도자는 흔히 하는 진부한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학식과 덕망이 출중한 사람을 일컫는다. 여기서 학식이라는 부문은 최고학부를 나와 박사학위까지 획득한 사람은 누구나 해당된다. 그 이상의 ‘학식’ 검증방법은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학식에서는 나무랄 수 없는 면을 갖췄다.

젊은 시절부터 한학을 익혀 나라의 운명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을 계몽했다. 미국에 가서는 명문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가 미국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 당시의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보다 더 뛰어난 학력을 소지한 사람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학문적 성취는 당대 일류였다. 광복 이후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이승만박사’라는 호칭을 좋아한 것만 봐도 학위획득에 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문제는 학식은 다락처럼 높은 사람도 ‘덕망’은 마루 바닥처럼 낮은 수가 있다. 덕망이란 학문의 수준이 높고, 인물이 잘 생긴 것과는 전연 관계없다. 다른 사람과의 교유에서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를 보여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서슴없이 주머니를 털어줄 줄 알아야 하며, 자기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덕망을 가진 사람으로 추앙받으려면 이기(利己)보다 이타(利他)하는 정신이 투철하지 않고서는 덕망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이승만은 젊어서부터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화합이나 단결 면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학문적 명성과 외교적 역량을 높이 산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했을 때 이승만은 흔쾌히 수락하고 임시정부에서 집무를 시작한다. 현재 상해와 중경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사무소에 가보면 구차했던 살림살이를 한 눈에 보게 된다. 비좁은 집에서 많은 각료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노력을 했다.

저녁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풍찬 노숙하던 독립운동 열사들은 호의호식할 수도 있는 조국 땅을 등지고 일본에 강점된 조국을 찾기 위한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승만은 6개월 정도 임시정부에 머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생활기반을 가진 그가 열악한 임시정부의 재정과 환경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의 독립은 무력투쟁보다는 전 세계의 호응을 얻는 외교를 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던 독립군의 전신적 지주(支柱)요, 배후세력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행태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각료회의에서의 토론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인간적으로 화합하지 못하는 권위주의 때문에 갈등을 빚어야 했다. 결국 이승만은 외교를 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활동해야 된다는 핑계를 대고 임시정부를 떠난다. 미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명함으로 미국 정부요로와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외교활동 비용까지 임시정부에 요청한다. 남부여대로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푼돈을 내거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들의 지원금으로 유지하고 있는 임시정부는 건물 임대료조차 내기 어려운 처지였지만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근무하지도 않은 판공비를 지급한 셈이다. 그는 미국에서도 교포들의 우상이 되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마찰과 분열이 조장된다. 한인사회는 이승만 지지 세력과 반대세력으로 나뉘어 각기 한인회를 표방한 단체를 만들고 각자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광복이 될 때까지 연면히 계속된다. 이승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파벌이 조성되고 이를 둘러싼 갈등이 교포사회를 분열시켰으며 이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 빼앗긴 ‘나라 잃은 백성’들이 남의 나라 땅에 와서도 반성하지 못하고 찧고 까부는 것이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이승만의 이러한 행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미국정부는 광복 후 이승만을 낙점하는데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등 민족진영 인사들은 미군정 하에서 암살된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구성을 위해서 남북협상을 시도했지만 쏘련의 앞잡이인 김일성은 교묘히 피해버린다. 김구는 아예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경교장에 칩거했으나 정부수립 1년도 되지 못하여 안두희에게 암살된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이용하여 쉽사리 대통령에 당선했으나 감탄고토(甘呑苦吐)로 곧 그들을 발로 차버린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며 그의 추종자들이 벌이고 있는 숭배운동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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