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겸 교수
김정겸 교수

[중앙뉴스=김정겸] 독일의 철학자 Kant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멋있고 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Kant를 외치는가? 그건 허세이다. 칸트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허세 떨기 위함이 아니라 겸손해 지기 위함이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자기도 피곤해서 자리 양보를 하는 것이 싫지만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라는 도덕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Kant의 정언명령(법) 중에 하나로서 내면적 선의지를 중시한 의무론적 윤리설에 따른 행동이다. Kant는 모든 인간이 목적의 주체로서 공존하는 사회 체제를 강조한다. 그는 정언 명법을 2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정언명법인 “자신의 행위의 준칙이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 되라”는 것은 남의 입장에 서서 행위 하라(역지사지)는 것이고 두 번째 정언명법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정언명법은 공정성의 형식적 원리이며 두 번째 정언명법은 인간을 목적적 존재로 간주하라는 내용상의 원리이다. Kant의 정언명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다.

즉 어떤 도덕도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어서는 안 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첫 번째 정언명법인 “자신의 행위의 준칙이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 되라”는 것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준칙을 정했다면 ‘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처럼 확대해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보편적 원칙에 따라서 살기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않된다. 보편적 법칙이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약속이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뜻에서  보편적 법칙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하는 사람에게서 이 정언 명법은 무신불립(無信不立)과도 같은 것이다. 믿음이 없어지는 이유는 거짓을 일삼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행동도 또한 거짓과 같다. 이는 상대방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고 그로인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정언명법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명법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상대방을 자신의 욕구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상대방을 이요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인간적인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다. M.Buber는 인간의 만남을 2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나-너”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나-그것”의 만남이다.  “나-너”의 만남은 서로가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만남이다. 이런 만남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나-그것”의 만남은 상대방을 사물인 “그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없고 자기중심적 논리를 전개한다.

정치도 상대방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상대방의 아픔을 더 헤집고 거기에 소금까지 뿌려 댄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동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찌 시민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절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정치가 불신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나-너”의 만남이 아닌 “나-그것”의 만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진정으로 보듬어 주지를 못한다.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발상과 발언을 일삼는다. 내가 던진 무심한 말, 사려 없는 말은 상대방에게 아픔이 되고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 그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정말 무신불립(無信不立)이 된다. 자신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김정겸/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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