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적 욕설, 페미니즘에 적개심이 많은 남고생, 작가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여권 정치인들을 폭로한 미투 운동과 여성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응 매뉴얼 제공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고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 A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 B군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역사 에세이를 쓰는 박신영 작가는 A씨와 B군 그리고 C씨(B군의 이모)를 만났다. 

박 작가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B군으로부터 수 차례 악성 댓글 피해를 받았다. 박 작가는 B군과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고 넷상에서 토론으로 마찰을 빚은 적도 없는데, B군은 무턱대고 욕설을 남겼다. B군은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글을 쓰는 페북 계정을 찾아다니면서 상습적으로 욕설 댓글을 달았고 박 작가는 이런 점을 알고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맘을 먹고 대응에 나섰다. 

B군의 페북 계정에는 “페미 다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대문글이 적혀 있었다. B군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개심으로 테러를 가하고 있던 것이다. 

B군은 페이스북 계정에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개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B군이 남긴 악플을 그대로 캡처해서 보관해뒀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이보다 더 많은 악플 내용이 있었지만 B군이 다 지워버려서 전부 확보하지 못 했다고 밝혔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11일 12시 서울 모처의 카페에서 B군을 만나 정식 사과와 각서를 받았다. B군은 어머니 A씨가 보는 앞에서 본인이 작성한 악플을 낭독했고 자필 사과문과 재발방지 각서를 작성해 박 작가에게 제출했다. 박 작가는 B군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법적 보호책임이 있는 A씨에 대해서도 사과문과 각서를 받았다.  

박 작가가 A씨, B군, C씨에 이날 진행될 사과문과 각서 작성 등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박 작가가 A씨, B군, C씨에 이날 진행될 사과문과 각서 작성 등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박 작가는 “B군과 같이 요즘 남성 청소년이 여성 청소년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종의 놀이가 됐고 이 친구가 나중에 성장해서 여성혐오적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며 “그게 개인적인 피해를 당한 것을 뛰어넘어 꼭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A씨와 C씨는 보통의 학부모가 그렇듯이 “우리 B군은 평소에 말수도 적고 조용한 편이에요.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성격이 차분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했다.  

B군은 박 작가에게 사전에 보낸 반성문 초고를 통해 “초등학생일 때 알게 된 여성 친구가 페미니즘적으로 남녀를 편가르기 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적이 있다”면서 페미니즘에 적개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실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에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었다. B군이 초등학생이던 시절이라면 적어도 4년 전인데 그 당시 같은 초등학생 이성 친구가 그런 의식으로 언행했다는 진술에 대해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A씨와 B군은 박 작가가 보는 앞에서 직접 사과문과 재발방지 각서를 작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A씨와 B군은 박 작가가 보는 앞에서 직접 사과문과 재발방지 각서를 작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B군은 당황했을 것이다. 많이 난처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욕을 하고 강하게 나오면 여성들이 위축돼서 그저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반격할 수 있다고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날 카페에는 박 작가가 사전에 동석을 요청한 페북 친구들이 10여명 가까이 모였다. B군의 욕설을 접한 여성들도 엄연히 인격체로서 항의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참석자들이 공감했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성희롱이나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을텐데 이렇게 좋은 매뉴얼을 만들어줘서 박 작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박 작가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모여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등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이날 참석한 박 작가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등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현재 안희정 전 충남지사·정봉주 전 의원·민병두 전 의원 등 여권 정치인들에 대한 성범죄 고발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데, 여권을 지지하는 일부 시민들이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피해 고발을 한 여성들에게 2차 가해를 일삼고 있다.

아무 근거없이 피해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욕하는 등 2차 가해를 일삼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다. 박 작가가 보여준 대응 매뉴얼은 이런 일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박 작가는 “B군이 욕설을 반복한 것과 그 내용을 봤을 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질 거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의 잘못으로 부모가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후에도 B군이 다른 여성들에게 그런 짓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이날의 사례가 좋은 매뉴얼이 될 것이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참석자들은 모두 이날의 사례가 좋은 매뉴얼이 될 것이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남성 참석자인 D씨는 “요새 유명인들이 미투 운동을 통해 걸리고 있지만 사실 가해자가 일반인일 경우에는 해시태그(단어 앞에 # 기호를 붙여 그 단어에 대한 글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가 잘 되지 않고 있다”며 “이게 피해 여성에게는 생존이 걸렸고 싸워야 할 문제다. 이렇게 미투 운동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 일반 피해 여성들에게 오늘의 이 자리가 유명인에 대한 미투 고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많지는 않을지 몰라도 남성들도 분명 작가님의 용기있는 행동에 응원을 보내고 있고 미투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밝혔다.

물론 박 작가의 방식으로 일일이 모든 언어적 가해자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등 미투 운동 이후 성범죄 관련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참고 사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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