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오 수필가 / 문학평론가
김정오 수필가 / 문학평론가

[중앙뉴스=김정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뇌물을 주고받다가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있다.

선물이란 고마운 사람이나 가까운 사이에 오가는 순수한 마음의 정표로서의 예물을 말한다. 그러나 결혼 할 때 신랑 신부 양측이 보내는 돈이나 물품을 ‘예물‘ 또는 '폐물'이라고 하여 선물과는 약간 다른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선물을 보낼 때 「대단찮은 것입니다만 부디(받아주십시오).」「下らない物ですが、どうぞ。」라고 하는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뜻으로 쓰고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은 미풍양속으로서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러나 대가성을 바라는 마음에서 주고받는다면 뇌물이 되어 결국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한나라 때의 '후한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창읍(昌邑) 태수 왕밀(王密)이 깊은 밤에 형주자사 양진(楊震)을 찾아 왔다.
황금 10근을 내놓으면서 "밤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양진이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 하는가? 天知神知我知子知,-(천지신지아자지)- 何謂無知(하위무지)?" 라고 호통 쳤다는 말은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또 명나라 여곤(呂坤)의 '신음어(呻吟語)에 暮夜無知此四字 百惡之總根也(모야무지차사자 백악지총근야)/ 大奸大盜皆自無知之念充之(대간대도개자무지지염충지)/天下大惡只有二種 欺無知 不畏有知 (천하대악지유이종 기무지 불외유지)
‘어두운 밤이라 아는 이가 없다는 말은 /온갖 악행의 뿌리이다. /큰 간사함과 큰 도적이 모두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마음에서부터 커져 나간 것이다. /천하의 큰 악행에는 단지 두 종류가 있다. /속여서 아는 이가 없게 하는 것과 /아는 이가 있어도 거리끼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때, 목포에 정병조(鄭炳朝,1879-1970)라는 기인이 있었다. 1919년 사이토(齊藤實)총독이 초도순시 차 목포에 왔다. 그때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판에 정병조라는 이름을 새긴 명함을 총독에게 주어 놀라게 했다.

그 후 그는 대건기업(주)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총독부 관리들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뇌물을 쓰면서 간척사업권을 따냈다. 

우리나라의 80%가 넘는 섬들이 목포 앞 다도해에 몰려있다. 그는 육지와 섬을 이어 목포시의 몇 곱이나 되는 간척지(干拓地)를 일구어 나갔다. 개땅쇠의 말 뿌리가 갯땅을 넓혀 나라 땅을 늘렸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 유달산 곳곳에 정병조라는 이름을 새긴 돌을 몰래 묻어두었다가 그것들을 일인들에게 파보이면서 유달산이 자신의 산이라 하여 세 번 씩이나 팔았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다. 

광복 후 경성법전을 졸업한 그의 아들 정영소(1902~?)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그때 유달산을 세 번이나 팔아먹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자 정병조는 "나는 일본사람들을 우롱한 적은 있어도 우리 겨레를 괴롭힌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일인들에게 유달산을 세 번이나 팔았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달산은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는 신익희 선생이 국민대학을 세울 때 수 만평의 땅을 재단에 기탁하고,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48년 목포 홍일고등학교를 세울 때도 1만 여 평의 땅을 기증했다. 그의 뇌물문제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일인들을 마음껏 농락했던 일과 갯벌을 육지로 만들어 나라 땅을 넓힌 일, 그리고 학교를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던 일은 박수를 받고 있다. 

▲ 김 정 오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겨레역사문학회장
   경기대·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현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지구문학」 편집인, 「시와 수상문학」고문
        광복회 회원, 안중근의사기념관 홍보대사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
   소청문학상, 법무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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