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생각이 머무는 곳에서 부터 시작

윤장섭 기자
윤장섭 기자

[중앙뉴스=윤장섭] 서울 지하철에는 미래의 주인공을 위한 핑크빛 카펫자리가 있다. 이 자리는 교통 약자, 특히 임산부를 위한 자리다. 하지만 핑크빛 카펫은 이미 만든 취지와 의도와는 달리 자격 없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된지 오래다.

임산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다면 그나마 봐줄만 하다. 하지만 이자리에 여성이 아닌 젊은 남성이 앉아 있는 모습은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볼수있다. 그 남성은 대단한 용기를 갖고있는 철면피(鐵面皮)임에 틀림없다.

임산부를 위한 자리라고 승무원이 차내 방송을 통해 수없이 이해를 구하지만 시민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더욱이 누구나 눈에 잘 띠도록 스티커까지 붙여 놨지만 수많은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채 자리에 앉아있는 젊은 청춘은 분명 한글도 모르는 사람일 게다. 정작 쉼이 필요한 임산부 여성들을 위한 빈자리로 나두는 배려 문화는 실종된 것일까?

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서 부터 대중들이 많이 이용하는 공공 시설 등에서 약자를 보호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문화라고 이야기한다.

문화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문화는 그것이 속한 담론(談論)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는 인류가 유인원의 단계를 벗어나 인간으로 진화하면서부터 이루어낸 모든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할 수있다.

또 문화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 가치를 따라야 한다. 그래서 문화는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되는 것이어서 정답이 없는 것이다.필자가 이야기 하려는 문화는 교양으로서 문화다.
 
최근 서울 지하철 핑크빚 카펫 이용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은 찬성과 반대로 팽팽하다. 배려는 의무가 아니라며 무작정 강요할 수 없다는 목소리와 교통 약자를 위한 시설은 최대한 비워두는 게 맞다는 목소리가 맞섰다. 결국 자리에 대한 다툼이다.

강요하지 말라는 측과 배려차원에서 비워두자는 자들의 주장은 모두 설득력이 있기에 누가옳고 누가 그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맞겨두는 것이 좋다. 필자의 생각은 후자에 속한다. 설영 내가 자리를 차지 했다하더라도 그 자리가 영원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했던 또 한분의 전직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이중적 행위가 검찰에서 낮낮이 밝혀지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서 보았듯이 권력의 자리가 영원한 경우는 없었다. 대통령의 자리도 별반 틀리지 않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지금까지 대통령의 자리는 수난의 역사다. 먼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임기중 하야를 했고 내나라가 아닌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윤보선 대통령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군인들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중 총에맞아 살해됐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후 수의를 입고 구속 수감되는 첫번째와 두번째 대통령이 됐다.

문민정부의 시작을 알렸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잘난 아들때문에 당신들의 정치역사에서 오점을 남기고 결국 자식을 감옥에 보내야 했다.

더 불행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비자금 때문에 퇴임후 고향에서 자살 했다. 더더욱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를 보면 우리 대통령들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 자린지 알수가 있다.

이렇듯 자리에 잘못 앉으면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배려는 생각이 머무는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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