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최한나
사진 / 최한나

 

봄밤을 위한 에스키스2

천서봉

 

  많은 날 다 보내고, 그 많은 사람 다 보내고 그래도 모자라 써봅니다. 벚꽃 편지, 나무를 안고 일어서본 사람은 알지요. 쿵쿵 나무의 심장이 들려주는 둥근 도장의 파문, 창문을 열며 꽃들은 통증처럼 터지고, 긴 봄밤 나는 허리 앓습니다. 허리라는 중심과 중심의 아득함, 점점 번지는 그 어지러운 덧없음이 집 근처를 서성거릴 때 나는 당신이 없는 집을 고치고...... 집을 다 고치고 나면 제 허리를 고칠 겁니다. 연골에 칼큼 긋듯 흐르던 겨울 별자리들, 소식 끊어진 날들은 어땠나요, 견딤과 견딤의 구부러짐, 한 장 한 장 벚꽃은 제 몫의 이별을 편지 쓰고, 이 긴 봄밤, 징검다리 같은 척추 디디며 나는 당신에게 못 갑니다. 휘어진 길들은 좀체 펴지질 않아요...... 벚꽃 편지, 많은 날 다보내고, 그 많은 사람 다 보내고 그래도 모자라 또 써봅니다.

 

- 천서봉 시집『서봉氏의 가방』(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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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사브락 사브락 간질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스산함이 조금 매달려 대롱거리는데... 그 많은 곡절 속에서도 다시 찾아와준 봄 벚꽃소식에 마음 환해진다.

지나온 삶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을 견딘 통증과 반성의 벚꽃편지라는 마음을 적는 시인의 실루엣이 난분분 처연한 춘정에 얼비친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의 생명력 이면에는 생의 덧없음도 그만큼 비례한다. 화자는 어쩌면 아직 고치지 못한 허릿병처럼 부칠 수 없는 편지지만 쓰고 또 써도 모자랄 그리움이 봄꽃처럼 봄마다 피어난다는 것! 우리에게 어떤 이별은 흉터처럼 남을 수도 있겠지만 내 청춘이 그다지 밋밋하지 않았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또 다시 봄 속으로 걸어간다.

오는가 싶으면 저만치 뒷모습 보이는 봄 그리고 벚꽃의 축제는 지루했던 겨울날에 대한 짧은 보상인가! 잎새들보다 꽃을 먼저 보여주는 봄은 배려의 여신 같다.

세상이 아무리 지지고 볶아대도 봄은 또 봄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봄의 생령들 숨소리에 귀기울여본다. 내가 떠나보낸 그 많은 봄들은 안녕하신가? 벚꽃 흩날리는 봄밤 한번쯤은 맑은 잔에 기울여보아도 좋으리!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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