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메시지, ‘홍준표’의 폭력적인 말 
4.3의 메시지, ‘홍준표’의 폭력적인 말 
  • 박효영 기자
  • 승인 2018.04.04 0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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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추도사, 홍준표 대표의 좌익 탓, 역사적 사건에 대해 섣불리 규정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1948년 4월3일의 역사적 사건. 8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과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낳은 참혹한 역사의 비극”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정당들도 모두 궤를 같이 했다. 단 자유한국당만 다르다. 

문 대통령은 3일 오전 제주도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석 이후 12년 만이다.

5.18, 현충일, 6월항쟁, 광복절, 2.28, 3.1절 등 역사적 기념일마다 문 대통령의 연설문이 큰 주목을 받았던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 대통령이 내놓은 4.3의 메시지(추도사)는 ‘국가폭력, 이념 대립에 따른 희생, 진실규명과 국가의 책임’이 핵심이다.

12년 만입니다. 대통령이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습니다.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국가적 추념행사로 위상을 높이겠다”는 후보자 시절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70년 전 제주의 4월, 유채꽃과 동백이 만발한 땅에서 이유도 모른 채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입니다. (사진=청와대)
대통령이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국가적 추념행사로 위상을 높이겠다”는 후보 시절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사진=청와대)

주요 대목을 살펴보면.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 유족회와 제주 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다”

제일 먼저 엄청난 희생과 사건 자체의 비극에 집중하는 것이 상식이다. 4.3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 규모만 ‘사망자 1만4000여명·추정 사망자 3만명·행방불명자 3171명’이다. 무장 분쟁의 당사자 중에서는 ‘좌익 무장대 1500여명·우익 토벌단 220여명’이다. 이 때문에 문 대통령도 추념사의 초반부에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끔찍한 피해 사실을 거론했다.

그야말로 참혹한 인명살상에 그 누구도 한 쪽 진영의 책임을 따져묻기 조심스러워지고 4.3 사건을 평생 연구한 학자들도 섣불리 역사적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지 못 한다.

하지만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이날 두 건의 글로 4.3의 성격을 규정했고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홍 대표는 페이스북에 올린 첫 번째 글에서 “(4.3 추념식은) 건국 과정에서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좌익 폭동에 희생된 제주 양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며 4.3의 성격을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따른 피해로 규정해 버렸다.

이어 올린 글에서는 “1948년 4월3일은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김달삼이 350명 무장 폭도를 이끌고 새벽 2시에 제주 경찰서 12곳을 습격 했던 날”이라며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날”이기 때문에 특별법을 개정할 때 민간인 학살이 주로 있었던 날짜로 기념일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제정된 특별법(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4.3 사건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공식적으로 합의된 정의가 있다.

4.3 특별법에 규정된 4.3 사건의 정의. (자료=법제처)
4.3 특별법에 규정된 4.3 사건의 정의. (자료=법제처)

1947년 3월1일 시위가 일어났고 여기서 제주도 경찰이 총을 쏴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법률에도 명시됐듯이 이 사건이 사실상의 시발점이었고 대략 1년 후 4월3일 남로당이 폭동을 일으켰다. 미군정의 결정으로 극우 세력과 육지 경찰이 제주도에 파견됐고 남로당 무장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진압은 5.10 선거 이후 집권한 이승만 정부 하에서 본격적인 보복과 광기로 점철됐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던 것이다.  

좌익 무장대와 우익 토벌단의 상호 보복에 따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003년 진상조사위원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만4000여명의 공식 사망자 중 78.1%가 토벌단(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됐다. 무장대(남로당)는 12.6%다. 문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따른 사과를 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즉 홍 대표가 4월3일 시작된 좌익 폭동 사건으로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규정은 명백한 오류이고 폭동 사건으로 시작된 역사적 살상의 피해자라는 취지였다면 그 표현을 정확히 했어야 했다. 오히려 비극의 책임은 우익 집권 세력에게 더 엄중하게 짊어진 측면이 크다. 홍 대표의 취지대로 더 정확하게 민간인 희생 기간을 가려내려면 첫 시작이었던 1947년 3월1일로 하든지 1948년 11월부터 49년 2월 사이의 구체적 대학살이 벌어진 사건일을 고려해봐야 한다. 

홍 대표는 두 번째 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CNN과 인터뷰 할 때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말 한바가 있다”고 했는데 당시 인터뷰의 행간을 보면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의 뒷부분에 방점이 찍힌 것을 알 수 있다.

맥락을 더 살펴보면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돼 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중략)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서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다”라고 돼 있다. 문 대통령의 4.3 메시지에서 국가의 책임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3.1절 28주년, 제주도민은 왜 ‘분노’했나 

그렇다면 1947년부터 1년 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발점이 된 사건을 일으킨 주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홍 대표의 발언이 얼마나 경솔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토지가 척박해 원래부터 가난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일제 시대 당시의 착취는 제주도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해방 이후 1946년과 47년에는 대흉년까지 겹쳐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다. 육지의 사람들이 대거 제주도로 건너오면서 식량난은 더욱 극심해졌다. 미군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세금으로 곡식을 거두는 ‘공출’의 양을 전체 생산량의 20%로 일괄 적용했다. 8만5000석(쌀1석=144kg) 중 1만7000석이 제주도에서 거둬지게 된 것이다. 배곯는 현실에서 민심은 흉흉해졌고 미군정의 쌀 수집 집행에 저항하는 도민들도 늘고 있는 상태였다. 서북청년단 출신의 외지 인물인 유해진 제주지사는 가렴주구의 표상과도 같았다.

여기에 해방 정국의 이념 갈등과 민족 갈등까지 더해져 제주도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이런 와중에 1947년 28번째 3.1절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촛불집회와 같이 제주도민의 민심은 폭발했다. 

제주도의 북국민학교에 3만여명의 도민이 집결했다. 거리로 나아간 시위대가 행진 중에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였다. 아무 사과없이 가버린 경찰에 시위대는 집단 항의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총을 쏜 경찰 때문에 무고한 도민 6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 경찰은 통행 금지령을 내렸고 시위자 몇몇을 연행하기도 했다.

남로당은 이를 기회삼아 경찰을 성토했고 많은 도민들이 호응했다. 경찰과 위정자들에게 쌓인 분노는 곧 대대적인 민관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공무원, 노동자, 학생 가릴 것 없는 하나의 흐름이었고 그 규모만 166개 조직의 4만1211명에 달했다.

문 대통령이 원 지사와 함께 평화공원 내의 묘지에 참배하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문 대통령이 원 지사와 함께 평화공원 내의 묘지에 참배하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미군정의 이념적 편향이 제주도민의 억울함을 보지 못 하게 가렸고 이는 곧 파업에 대한 강경 진압의 토양이 됐다. 현지 경찰의 일부마저도 동참한 파업은 그렇게 빠르게 진압됐다. 파업의 동력이 완전히 약화된 뒤에도 박해는 지속됐다. 육지에서 온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경쟁적으로 파업 참가자를 색출했고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 가혹한 고문을 일삼아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했다. 감옥 밖의 도민들도 서북청년단의 깡패짓에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8년 들어 남로당의 당원이 고문으로 죽게되자, 홍 대표가 언급한 그 무장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350여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12곳의 경찰서를 습격했는데 경찰 4명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을 죽였다.

결과적으로 김달삼(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등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결정은 박정희·전두환의 쿠데타와 같이 체제 전복에 성공하지도 못 했고 많은 이들의 희생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매우 어리석었다. 실제 무장대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반동분자로 몰아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럴만한 빌미를 만들어준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4.3의 핵심은 ‘대학살’과 ‘이념에 따른 희생’

바른미래당으로 통합됐지만 과거 새누리당에서 홍 대표와 한솥밥을 먹던 바른정당 출신 유의동 의원(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무고하게 희생된 모든 분들을 추모하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4.3 항쟁의 진상 파악과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논평했다. 

공식 명칭은 4.3 ‘사건’이지만 문 대통령은 ‘4.3’이라고 표현했다. 유 의원은 오히려 더 나아가 “제주 4·3 항쟁 정신을 계승할 것을 약속드린다”며 4.3 ‘항쟁’이라고 지칭해 피해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5.18 ‘사태’가 아닌 5.18 ‘민주항쟁’이라고 불리면 저항한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유 의원은 “제주 4.3 항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과거 냉전 시기 좌우 진영의 극한 대립에 있었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인정하지 못 하고 배제하려 했던 것이 씻을 수 없는 참사를 불러온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 한다.  

바른미래당의 공식 논평이 여기까지 나아갔으니 다른 정당들은 더 볼 것도 없다. 

막말로 악명높은 홍 대표의 즉흥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장제원 한국당 수석대변인이 낸 공식 논평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 대변인은 “학살로 안타깝게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면서도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한 무장폭동으로 시작되었다”고 단편적으로 좌익 세력의 책임만 부각했다.

특히 “남로당 무장대가 산간지역 주민을 방패삼아 유격전을 펼치고 토벌대가 강경 진압작전을 해 우리 제주 양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며 남로당에게만 비극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1949년 1월 4일과 5일, 곤을동 마을에 들이닥친 국방경비대는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습니다. 바닷가로 끌고간 젊은 남자들을 먼저, 그리고 학교에 가둬두었던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살던 집은 모두 불태워지고 이제는 마을의 흔적인 축담, 올렛담 위로 수풀만이 무심하게 자라납니다.
1949년 1월 4일과 5일, 곤을동 마을에 들이닥친 국방경비대는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바닷가로 끌고간 젊은 남자들을 먼저, 그리고 학교에 가둬두었던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살던 집은 모두 불태워지고 이제는 마을의 흔적인 축담, 올렛담 위로 수풀만이 무심하게 자라나고 있다. (사진=청와대)

1947년부터 54년까지 4.3의 유효기간은 7년이지만 대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49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일어났다(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48년 한 해 동안 1만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중 80%가 군경토벌대의 소행임).

1948년 남한에서만 5.10 선거가 치러졌고 직후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로당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에 이른다(초토화 작전). 남로당이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선거 방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제주도경비사령부’라는 자체 토벌 조직을 설치했고 11월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송요찬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대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과 하등 관계없는 민간인이 대대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유시민 작가가 4.3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규정할 수 없는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캡처사진=tvN)
유시민 작가가 4.3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규정할 수 없는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캡처사진=tvN)

2017년 11월24일 방송된 tvN <알쓸신잡2>에서 4.3을 다뤘는데.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한 마을에서 우리 할아버지를 누구 집 아들이 죽였는지 안다. 그니까 육지에서 온 군인이나 경찰, 서북청년단이 죽인 것은 외지사람들이 와서 제주도민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 안에서 좌익들이 사람을 죽인 것은 동네사람들이 죽인 것이다. 도저히 화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이걸 논리적으로는 풀 수가 없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누가 죽였는지를 따지지 말자. 좌우를 막론하고 이 모든 희생자들을 한꺼번에 애도하고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서 국가를 대표해서 대통령이 사과하고 그 뜻을 담아 평화공원을 세우고 그리고 결론을 내지 않는 거다. 이렇게 서로 용서하고 잊는 것이다.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용어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는 상당히 세월이 지나고 감정의 격동없이 이 문제를 살필 수 있을 때 그때는 어떤 이름이 붙을 거라고 본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4.3 사건을 쓴다.”

국가폭력의 야만이 핵심이지만 함께 터를 잡은 좌익 인사들과 동네 사람들 간의 살인도 있어서 7년의 비극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도 추도사에서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 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 유족회와 제주 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다”며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홍 대표의 폭력적인 규정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비켜갔을 뿐만이 아니라 사실관계도 왜곡했고 피해자 유족에게도 큰 상처를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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