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의 갈등, 사업의 위기에서, 돈 보다는 의미를 찾아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가 담긴 '팝업북' 개발로 제2인생

인생이모작에 '팝업북' 대모로 거듭나고 있는 이미경 씨
인생이모작에 '팝업북' 대모로 거듭나고 있는 이미경 씨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여성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늘 새로움에 도전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욱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문성은 물론 스펙도 없는 여성이, 그렇다고 주위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할 환경도 없이 덩그러니 어린 두 남매만을 안은 엄마가. 그러니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세상과 맞장 뜨기로 살아왔을 것이고. 수 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인생이모작의 화폭에서 자신의 이름에 환한 빛을 밝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국제팝업북아트협회 이미경 대표(53세) 그녀가 바로 인생 이모작의 주인공이다. 
 
 “글쎄요.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받는 느낌은 없었어요.”

남성중심사회에서의 홀로서기까지의 여성의 좁은 입지를 두둔하자 그녀의 답은 예상 밖으로 빗나간다. 그러고 보니 외모부터가 생각 밖이다. 걸걸한 여장부일거라 생각했는데. 작은 체구에 앳된 이미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강한 흡입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그것으로 봐 세상과 맞장 뜬 그녀의 면모가 엿보인다. 그런 그녀의 인생이모작을 엿보기로 한다.  

고용주의 결정에 삶이 좌지우지되는 건 참을 수 없어

“어릴 적 한 때는 화가를 꿈꾸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일찍 사회에 나와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어요. 혼자서 누구의 도움 없이 두 남매를 키워야 했어요. 두 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하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렇게 제 나이 서른이 되었는데도 저는 일에 정착을 못했어요.

특별히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구하는 일자리 마다 뻔했어요. 고용주 맘이라 늘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했어요. 그때도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찾고 있을 때, 주변의 한 50대의 여성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도 직장을 잃고 새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그녀는 저보다 더 힘들어보였어요. 50이 넘으니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거죠.

그때 전 결심했어요. 고용주의 결정에 의해 내 삶이 좌지우지 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래서 피고용인 보다는 인권을 존중하는 고용주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능력도 스펙도 비빌 언덕도 전혀 없는 제게 그것이 어디 쉬웠겠어요.

하지만 뭐든 남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덤볐어요. 두 아이의 양육을 병행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사업을 계획하고 준비했어요. 서른셋의 나이에 자본금 없이 NGO 기관의 도움으로 여성인력파견 사업을 시작했어요.” 

도자기 공방에서 가족과 휴일을 함께하는 이미경 씨 (사진=이미경 씨 제공)
도자기 공방에서 가족과 휴일을 함께하는 이미경 씨 (사진=이미경 씨 제공)

33세의 나이에 무자본으로 여성인력파견 사업...1년 만에 실패의 쓴 맛

일터의 고용주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 되는 삶에 회의를 느낀 그녀가 사업주가 되겠다며 시작한 사업이 여성인력파견업체.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높은 산이었단다. 

“정말 쉽지 않았어요. 추진력이 강했던 저는 기관의 업무 처리 방식과 사업 목적성의 불일치로 갈등을 겪어야만 했어요. 그 혼란을 겪으면서 1년 만에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그렇다고 거기에서 그냥 주저앉으면 이미경이 아니었단다. 그녀는 다시 재도전을 꿈꾸었다고. “2000년도에 일반화되지 않았던 사업방식인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조합원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무엇보다 자본금이 없으니. 무자본에 열정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계획을 접어야만 했어요. 그리고 1년 후 다시 개인 창업에 재도전 했는데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의미 있는 도전이었어요. 그 때 시작한 사업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했던 베이비시터 파견 사업이었어요.”

지금의 이미경을 있게 한 ‘베이비시터’ 파견업을 창업하고 

하지만 당시 베이비시터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홍보와 창출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단다. 

“베이비시터 지망생을 모집해 교육 후 아이 돌봄이 필요한 가정에 방과후 교육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었는데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종 사업이라서 홍보부터 수요 창출까지 무척 힘들었어요.

그러니 그 사업도 오래할 수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그 일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일이 되었어요. 그 일로 용기와 힘을 얻어 풍선아트를 배우기 시작했으니까요. 재미있었어요. 잘 한다는 소리도 듣고. 그때 한국풍선아트협회장님으로부터 그 사업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때는 풍선아트 업계의 초창기여서 풍선아트의 활용도가 다양했는데. 깊은 고민 없이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어차피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제 젊음과 패기를 자본 삼아 나선 그 사업에서 저는 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풍선아트전문가 교육, 돌잔치, 웨딩, 각종 행사장 등의 장식 디자인을 개발하면서 시장을 개척해 나갔는데 정말 잘됐어요. 그러면서 풍선아트의 호황기를 열어 간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일에 묻혀 있다 보니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했던 것 같아요. 제 대신 엄마 역할을 잘 해주던 딸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변하기 시작한 거예요. 동생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저와 겉돌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런 아이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8년, 딸아이가 고3이 되면서 저와 더욱 거리를 두게 되는 상황까지 됐어요.

설상가상 사업에도 위기가 닥쳤고요. 딸아이와의 갈등이 빚어지고 사업은 사업대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때 처음으로 좌절하고 방황했어요. 그 전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처럼 절망하지 않았는데...

아이와 갈등, 사업의 위기에서...돈 보다는 의미를 찾는 제 2인생

그러니까 고 3의 딸아이와의 갈등과 사업의 위기에서 그녀는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단다. 즉, 돈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라는 생각에 제2의 인생의 서막을 열게 되었단다.  
 “삶의 초점을 가족의 행복에 맞추어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사회 공헌에 눈을 돌려 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찾자는 생각이었지요. 현실적인 욕구 충족보다 이상적인 목표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 거죠. 그렇게 시작한 일이 팝업북이었어요.”

딸과 나란히 늦깎이 대학생... 팝업북의 문을 열고

사회에 공헌을 하자는 생각에 눈을 돌린 사업이 팝업북이었다는 그녀에게 그 선택의 계기를 묻자 웃음을 보였던 전의 표정과는 달리 갑자기 표정을 굳힌다. 그것이 살짝 근엄하기까지 하다.

“사업위기에 앞서 2006년이던가요. 한 지인이 팝업북을 연구해서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 당시 저는 사업에 한창 바빴고 또 팝업북의 기술이 어렵고 난해해서 그 당시에는 덮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내 삶의 가치관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자 그때의 일이 생각났어요.

그때 팝업북은 국내에서 개발할 수 있는 기술자가 전무해서 해외의 팝업북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또 학계에서는 팝업북이 어린이의 창의력 발달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들을 쏟아내면서 국내 팝업북 산업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던 중이었고, 어쨌든 팝업북이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았던 때였어요.

아시다시피 팝업북은 일반 책과는 다른 입체적인 것이라 높은 제작비용 부담으로 출판업자들이 기피했으니까요. 또 정교한 제작기술이 필요한 것이라 그런 기술력을 가진 기술자들도 필요했고. 전 그런 요인들을 해결하고 싶었어요.

즉 저의 애국심을 자극했다고 할까요? 한국의 어린이에게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가 담긴 팝업북을 개발해서 제공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긴 거죠. 그때부터 팝업북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이죠. 공부도 다시 시작하면서요.  

대한민국 브랜드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을 한 중앙의 이미경 씨(사진= 이미경 씨 제공)
대한민국 브랜드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을 한 중앙의 이미경 씨(사진= 이미경 씨 제공)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가 담긴 팝업북 개발

애국을 하겠다는 사명감에 팝업북으로 사업을 전환한 그녀는 딸과 나란히 늦깎이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마쳤다고 한다.

즉, 팝업북에 대한 연구는 물론 팝업계의 리더가 되기 위한 전초전이었단다. 그렇게 일과 못다 한 공부를 마친 그녀는 현재 우리나라의 팝업북의 대모로 팝업북 전문인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또 유치원과 초등학교, 청소년이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용 팝업북을 연구 개발로 DIY 체험용 팝업북을 제작해서 공급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계획을 묻자 팝업북의 교육적 가치를 연구하고 검증해서 학문으로 반석위에 올려놓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힌다. 

팝업북 전공학과 설치로 전문인 양성 필요

 “앞으로 팝업북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급자인 엔지니어의 인력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별도의 전공과를 설치하여 전문인을 양성하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그래야 우리도 세계무대에서 실력으로 승부하여 국위 선양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일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세상에 정답은 없다! 나의 선택은 소중한 것

이처럼 당차고 호기롭게 살아온 그녀도 살아온 삶이 힘들었음을 내비친다. 되돌아보면 힘들고 외로웠던 적도 많았다고, 그렇지만 그 고난을 극복할 때마다 스스로가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단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 또 자신의 인생철학에 관해서는 목표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인간관계는 한 발 물러서서 양보하고 조율하는 미덕이 필요하단다. 그런 그녀가 자신 스스로에게 할 말이 있단다.

“그래 미경아, 참으로 열심히 잘 살아왔어, 맞아 세상엔 정답이 없어, 그냥 열심히 사는 거야. 앞으로도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거야. 너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네게도 너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이가 항상 곁에 있잖니. 그러니 안심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사는 거야.”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