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가교자 왕기석 명창...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으로 만나다
문화의 가교자 왕기석 명창...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으로 만나다
  • 신현지 기자
  • 승인 2018.04.16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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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 전 대통령 노제 '만가',이어 4주기 추도식 ‘노랑 바람개비의 노래 불러
백제가요 ‘정읍사’와 가사문학의 효시 ‘상춘곡’ 맥 잇는 창작에 전념
정읍의 국공립예술단체들 ‘천명’ 평양무대 올려 통일에 기어하고파
정읍시립국악단장인 왕기석(55세)씨 (사진=신현지 기자)
시립정읍사국악단장 왕기석(55세)씨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세상은 늘 변화를 꿈꾼다. 변화를 통한 세상은 더욱 화려한 문명의 세계다. 그러니 앞도 옆도 뒤도 돌아볼 틈 없이 현대인은 변화에 급급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들 뒤를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참된 문명이야말로 오랜 전통에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시대를 병행하는 이들도 많다.

이 시대의 소리꾼, 정읍시립국악단장인 왕기석(55세)씨가 그렇다.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시대의 흐름에 맞는 唱의 대중화에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더욱이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만가(상여소리)'에 이어 4주기 추모식의 ‘노랑 바람개비의 노래’를 현 시류(時流)에 실어 창(唱)의 진가를 확인시켰다.  

“득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면 안 되는 얘기죠”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완창 무대만 해도 30회를 넘긴 왕기석 명창의 첫 마디다. 그러니 그가 이 시대의 소리꾼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그 노고가 가늠된다.

설핏 다가서는 이미지 역시 오랜 풍상을 견디어 낸 마디 굵은 거목이다. 결코 그 속을 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 하지만 마주 앉은 그는 의외로 입을 여는 것에 인색함이 없다. 

소리꾼 3형제 중 세째 기창이 형을 만나기 위해 찾았던 국립창극단에서 즉석 캐스팅으로  판소리예능보유자가 된 왕기석 명창(사진=정읍시립국악단장 왕기석 씨 제공)
명창 기창이 형을 만나기 위해 찾았던 국립창극단에서 즉석 캐스팅으로 판소리예능보유자가 된 왕기석 명창(사진=왕기석 씨 제공)

소리꾼 기창이 형을 만나기 위해 찾았던 국립창극단이 오늘의 왕기석을 있게...

“전 전라도의 정읍 옹동의 지지리 가난한 농부의 팔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오죽 가난했으면 초등학교에서 두 명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그 중에 한 명이었겠습니까.

무작정 서울로 상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경한 서울에서 생계를 위한 노동판에 뛰어들어 어린 뼈를 굳혔습니다. 그런 제게 행운이 찾아온 건 18살 되던 해였지요.

셋째 형을 만나기 위해 찾았던 국립창극단이었습니다. 그곳의 단원이었던 형을 만나러 갔던 국립창극단에서 운 좋게도 남해성 스승님을 만났던 겁니다.

소리꾼 왕기창 형님의 동생이라는 말에 그분은 대뜸 “목구성(목소리에 구성진 맛) 한번 들어보자고 하셨고 그것에 전 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어설픈 소리를 들려드렸습니다.

그 어설픈  소리에 스승님은 대뜸 제 형님께 ”니 동생 나 줘라“ 하시며 절 즉석 캐스팅을 하셨던 겁니다. 그게 오늘의 왕기석을 있게 한 겁니다. 그러니 선대의 소리를 하시는 분이 없는 우리집안에서의 소리꾼이 된 건 팔자소관(八子所關)이라고 해두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학력은 언제나 내게 콤플렉스

하루아침에 막노동꾼에서 국립창극단에 연수단원이 된 그는 그렇다고 행복한 건 아니었단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늘 그를 괴롭혔다고.

“배우지 못한 그것이 제겐 늘 한이었습니다. 가장 큰 콤플렉스였어요. 예술계의 어르신들은 소리만 잘하면 되지 가방끈 길어서 무엇하겠냐?”며 소리만 신경쓰라고 하셨지만 전 못 배운 소리꾼이라는 말이 듣기 싫었고 그것이 날 힘들게 했어요. 결국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학을 마쳤고요. 이미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주역이었지만 대학교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었던 겁니다. 저는 그렇게 감성적인 예술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이 만나 논리를 창조하는 신세계를 경험하고서야 그 갈증이 풀렸습니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2014년)로 지정 

이렇게 배우지 못한 한을 풀어냈으니 그의 소리세계는 바람에 돛을 단 듯 거침없는 항해였단다. 2005년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비롯한 국립창극단 지도위원 활동으로 판소리계에 입지를 굳히는 한편 창의 대중화에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다.

즉, 창작의 ‘어린이창극’의 영역을 확산하고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통해 ‘논개’‘백범 김구’를 비롯한 창작 창극작품과 전주사투리, 녹두장군 비빔밥전 등의 창작판소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어 2014년에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소리꾼에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이와 더불어 2014년 KBS국악대상과 2017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굵직한 상을 거머쥐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읍시립국악단장 왕기석 씨 (사진= 왕기석 씨 제공)
정읍시립국악단장 왕기석 씨 (사진= 왕기석 씨 제공)

특히 그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에서의 만가 (상여소리)와 4주기 추도식의 ‘노랑 바람개비의 노래’를 불러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 당시의 소감을 묻자 그는 다소 숙연해지는 표정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만가에 이어 4주기 추도식에 ‘노랑 바람개비의 노래’ 불러

 “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를 지낼 때 만가(상여소리)를 제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계기로 추모음반 제작에 참여하여‘노랑 바람개비의 노래를 작곡해서 음반을 내 놓았습니다.”
뭔가 긴 이야기가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그는 말을 아끼는 표정이다. 그 일로 혹 어떤 불편함은 없었냐는 질문에도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다.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고, 아무튼 35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35년만의 귀향, 시립정읍사국악단장으로 위촉...문화를 잇는 가교자로

그렇다고 그것에 위축이 되는 건 조금도 없단다. 아니 35년의 서울살이를 마치게 된 연유야 어찌되었든 그의 귀향은 문화의 가교자로서 막중한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기에 서울을 미련 둘 여유는 없는 것이었다.

가난에 중학교 입학도 하지 못한 채 쫒기 듯 떠나온 고향은 그를 시립정읍사국악단장(2013년) 위촉으로 열렬히 환대했고 그 역시 고향사랑이 남다른 만큼 고향에서의 펼쳐야 할 과제가 산재해 있다는 것에 늘 가슴이 뜨거웠으니. 고향에서의 특별한 창극무대의 활동을 들어보기로 한다. 

“우리 고향 정읍은 현존 유일의 백제가요'정읍사'와 가사문학의 효시인'상춘곡'근대화를 연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그리고 호남우도농악의 발상지 등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입니다.

그러니 그것의 맥을 이어야지요. 정읍시립 정읍사국악단에서 할 일이 많아요. 그동안 이러한 지역문화콘텐츠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해 왔고요. 올 해에는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을 주제로 해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매월 음력보름마다 정읍사공원에서 상설공연을 진행하고 있고요. 지난  2015년에 만든 쪽빛황혼이라는 가족창극이 있는데 그 작품이 올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서 우수작품 레퍼토리로 선정되어 외부로 공연도 가게 됐습니다."

정신적인 지주 셋째 형 왕기창, 여전히 가슴에 남아 

고향에서의 이처럼 왕성한 활동에도 순간순간 스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저미는 건 어쩔 수 없단다. 셋째 형 왕기창 명창이다. 셋째 형의 그리움에 그는 오늘도 먹먹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다. 

“형님은 정신적인 제 지주였습니다. 그러니 셋째 형 왕기창의 죽음은 지금도 가슴에 커다란 무덤으로 남아있습니다. 나에게 소리의 길로 인도했던 형! 나를 국립창극단에 들어 올 기회를 마련해 준 형! 지금의 나, 왕기석을 흔들림 없이 소리꾼의 길로 매진할 수 있게 바로 잡아주던 형!

왕기창 형은 젊은 오십대 초반에 간경화로 세상과 등졌지만 아직도 제게는 거울처럼, 때로는 교사로서 저 왕기석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음악은 그 시대를 반추하는 것 전통을 바탕으로 변화를 시도... 

우리 사회 어디에든 크고 작은 갈등은 있는 것 판소리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에 그의 생각은 확고하고 명료하다.

“판소리의 다양한 유파는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음악은 그 시대를 반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맞는 판소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法古創新”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판소리의 대중화를 꿈꾸는 왕기석 명창에게 있어 소리(唱)란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며 남다른 소리사랑의 소신을 밝힌다. 

“제게 소리란 ‘님’이지요. 그래서 가장 그리운 존재이고 소중한 존재이며 또 저를 오늘에 있게 하는 절대적인 존재이지요. 즉, 소리는 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천명으로 받아 안고 소리만이 오롯이 전부인 그에게 있어 후학양성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제자들에게 특별히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진정한 소리꾼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사람만이 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예술을 하려면 중앙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놀고 있는 물이 가장 큰 물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는 겁니다. 나름대로 예술성을 향상시켰다면 그게 중심인거죠. 항상 처음 입문했을 때의 그 생각을 잊지 않고 끝까지 노력 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전라북도 국공립예술단체 작품 ‘천명’ 평양 무대에 올려 통일에 기여하고파

해학과 풍자로 당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거침없는 이시대의 소리꾼 왕기석 명창,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벌써부터 가슴이 뜨겁다며 그의 소리만큼이나 진중한 무게감을 나타낸다.

“제가 지금까지 약200여 편의 창극에서 주연을 맡은 거 같은데, 특히 역사적 인물인 이순신, 김구, 안중근, 전봉준 역할을 했어요.

특히 전봉준 역할, 작년 소리축제에서 성공적으로 마친 동학을 주제로 한 공연“천명”이라는 작품은 제가 23년 전부터 지금까지 해온 역할입니다.

욕심이 있다면 남북관계가 잘 풀려 전라북도 국공립예술단체들 모두 함께 ‘천명’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평양에 가서 많은 관객들(약 5만명 이상?)을 모아놓고 공연을 하는 게 제 꿈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에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져 발생한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랑이 통일을 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거죠. 예술적 교류가 앞서가고 정치적 교류가 그 뒤를 이어서 통일에 기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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