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의 숙원 과제 3대 적폐 청산, 문재인 정부 이후 생각보다 더딘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투쟁, 발달 장애인 투표권 보장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는 “장애인을 시설에 쳐박아놓고 그걸 사랑이고 복지라 말하는 세상에 맞서 우리가 2002년부터 4월20일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정하고 싸워왔던 역사를 세상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 시민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 시민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9년의 보수정권 책임자가 모두 감옥에 갇히고 문재인 정부가 집권했지만 장애인의 인권 수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수용시설 폐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예산 편성은 더디다. 박 장관은 19일 수용시설 체험을 하는 바람에 장애인 단체의 원성을 샀다. 수용시설을 폐지한다고 해놓고선 시설 체험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2018년 발달장애 관련 예산이 90억원에서 85억원으로 삭감됐고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시행을 요구하며 청와대 주변에 농성장을 차렸다. 몇몇 부모들은 삭발까지 감행했다. 

윤종술 부모연대 대표는 “문재인 정부 1호 정책이 치매국가책임제다. 치매로 가정의 붕괴를 낳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발달장애인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족이 엄청난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도 선포해야 한다”며 “발달장애인법이 시행된지 3년이 됐지만 예산은 고작 85억원이다. 이 예산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 정부가 통크게 국비 1500억원 지방비 1500억원 투자로 낮시간 데이케어서비스 등을 책임질 계획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종술 회장은 직접 전국장애인부모연대를 만들었고 발달장애 관련 시민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윤종술 회장은 직접 전국장애인부모연대를 만들었고 발달장애 관련 시민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38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19일 18시 장애인 77명이 휠체어에서 내려 온몸으로 청와대까지 행진했다. 오체투지다. 장애인들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호소했다. 

박 장관이 약속만 했지 아직 이행이 더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수용시설 폐지를 다시 한 번 촉구하기 위해서다. 5년 넘게 광화문역 안에서 농성을 했던 걸 철수한 것도 박 장관이 지난해 8월 직접 찾아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사진=박효영 기자)
광화문에 오체투지를 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발달장애인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장애인들이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비장한 표정으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장애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장애등급제는 선별적 복지 차원의 차별적 성격 때문에 비판받아 왔다. 예컨대 뇌병변장애 4급인 장애인은 활동지원 신청자격이 1~3급으로 제한돼 있어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었다.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고 싶어도 1~2급 장애인만 이용할 수 있어서 3급 지체 장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더 불쌍한 삶을 부각해서 학자금 대출 지원을 받는 대학생이나 무상급식비를 지원받기 위해 부모의 가난함을 증명해야 하는 초중학생의 현실과 비슷하다. 장애인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등급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문제가 더 크고 본질적이다.

복지부는 2019년 7월부터 2022년까지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장애인 개개인의 욕구와 환경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종합적 욕구조사’를 도입해 일상생활지원·아동지원·소득고용지원을 할 방침이다. 장애인 단체들은 그럼에도 이로인해 수반돼야 할 예산 확보가 더디다는 입장이다. 

부양의무제는 부양의 의무를 직계 가족에게 떠넘겨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는 독소 제도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경제적 현실에 허덕이더라도 법률상 직계 가족이 있으면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 하는 것이다. 복지부는 이것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혔으나 생계급여와 의료급여는 뒤로 밀려 부족하다는 게 장애인 단체의 주장이다.  

수용시설 폐지 문제는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장애인을 특정 시설에 몰아넣어 고립화시키기 때문에 사안이 중대하다. 복지부는 아직 수용시설 폐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다. 있긴 있는데 너무 미진하다.  

장애인 단체들은 이를 3대 적폐로 규정하고 ‘3대적폐 폐지를 위한 공동행동’을 결성했다.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총력 투쟁을 하기 위해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도 조직했다. 

박능후 장관은 지난해 8월 광화문역에 마련된 농성장을 직접 찾아 3대 적폐에 대해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능후 장관은 지난해 8월 광화문역에 마련된 농성장을 직접 찾아 3대 적폐에 대해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날 15시에 열린 투쟁결의대회에서 박경석 대표는 “정부에 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연금 대상자를 늘리라고 했더니 문 대통령 임기 말인 2022년에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누가 믿나. 탈시설에 대해서도 내년 중에 시설에 사는 3만명 중 100명만 탈시설시키겠다고 한다”며 문재인 정부의 장애인 정책에 쓴소리를 했다.

앞서 이날 오전에는 한국피플퍼스트(발달장애인 모임)가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쉬운 투표용지와 공보물을 제공해 장애인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플퍼스트는 1973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열린 촉구대회에서 한 장애인 참가자가 “지능이 낮은 사람이나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나는 먼저 인간으로 대우받고 싶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 세계적인 단체다. 한국은 2016년 8월에 공식 출범했다.

피플퍼스트 대회 포스터. (자료=한국피플퍼스트)
피플퍼스트 대회 포스터. (자료=한국피플퍼스트)

고영철 피플퍼스트 인천위원장은 “엄마가 찍으라는 사람 말고 내가 투표하고 싶은 사람을 찍게 해달라. 나한테 잘 하는 사람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구본형 피플퍼스트 서울위원장도 “정당 이름이나 선거 정보가 어려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알려주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또한 매번 투표소 위치를 알려주는 정보가 어려워 길을 헤맸다. 버스를 타서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발달장애인에게는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며 맞춤형 상세 정보를 촉구했다.

한국피플퍼스트는 △그림과 쉬운 글로 제작된 선거 공보물 제공 △지역별 맞춤형 설명회 개최 △조력인 배치를 통한 비밀투표 보장 △맞춤형 정당 로고와 후보자 사진이 들어간 그림투표용지 제공 등 네 가지를 요구했다.

김정훈 피플퍼스트 위원장은 “정당들은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공직선거법 개정 전까지 발달장애인이 쉬운 공보물을 제공 받지 못 하는 것은 문제”라며 정당의 책임 떠넘기기를 꼬집었다.

김대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담당자도 “법 개정이 아니라도 선관위(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규칙을 변경하면 쉽게 그림투표 용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핑계만 댔다”고 비판했다.

대학로에서 열린 두 개의 대회

20일 13시에는 공동투쟁단 주최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투쟁결의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장애인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공동투쟁단은 더딘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대통령과의 직접 대화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3대 적폐를 비롯 △중증장애인 노동권  △활동지원 권리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도입 △UN 장애인권리협약 이행 등 이러한 요구사항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결국 문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경석 대표는 “1842일에 걸친 광화문 지하농성 끝에 정부가 직접 대화에 나서는 진전이 있었지만 박능후 장관은 뭔가 하고 싶어도 기획재정부 눈치만 보고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개 요구에 대해 미온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차별받았던 밑바닥 국민들을 만나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투쟁단은 결의문에서 “일자리 81만개 창출 공약 속에 장애인은 없고 치매 국가책임제는 있지만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는 없다. 아동수당이 확대됐지만 장애인 연금은 제자리다. 촛불 정부라고 문재인 정부가 자임한다면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은 3대 적폐청산을 위해 예산을 마련해야 하고 그게 2008년 한국 정부도 비준한 UN 장애인권리협약의 완전한 이행”이라고 밝혔다.

장애인의 날인 20일 오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서울 종로구 효자동 청와대 앞길에서 마로니에 공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공동투쟁단은 문재인 정부에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같은 장소에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촉구대회도 열렸다. 한국피플퍼스트와 피플퍼스트 서울센터는 △참정권 △장기적인 일자리 △독립권 등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2014년 4월 발달장애인법(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지만 3년이 지났음에도 관련 예산은 10분의 1(매년 400억원~800억원 필요하지만 2018년 85억원 편성) 수준이다.
 
김영래 한국피플퍼스트 경남위원장은 “우리가 도전하기 전에 미리 해주거나 조금만 어려워 보여도 먼저 다가와서 문제 해결을 해주니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별로 없다”며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도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해보는 연습을 많이 하고 싶다. 정부가 발달장애인들에게 많은 예산을 지원하고 자립 연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정숙 여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장애인개발원)
김정숙 여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장애인개발원)

한편, 20일 복지부도 장애인의 날 기념식을 63빌딩 그랜드 볼룸에서 개최했다. 

영부인인 김정숙 여사는 이 자리에 참석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한 시설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사회에 함께 살면서 차이를 차이라고 인식하지 못 하도록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를 만드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발언했고 박능후 장관은 “(5차 장애인 정책종합계획이) 이행된다면 시설 중심에서 탈시설 지역사회로 전환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