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오 수필가 / 문학평론가
김정오 수필가 / 문학평론가

[중앙뉴스=김정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김정은 남북한 두 정상이 “완전한 비핵화의 실현"을 선언했다.

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던 온 누리 사람들은 환호했다. 북한에서 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45년 일제 강점기 때부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이 믿고 있던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악명 높은 731부대의 세균 무기였고, 또 다른 하나가 원자폭탄이었다.

 도쿄 대 공습 일주일 후인, 1945년 3월말 독일의 킬(Kiel)항을 떠나 일본으로 오던 2만2천 톤급의 U-234호 잠수함이 있었다.

35살의 펠러(Johann Heinrich Fehler)가 지휘를 맡고 있는 이 잠수함에는 두 개의 컨테이너가 실려 있었다. 그 속에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우라늄이 들어 있었다. 

 그때 유럽의 바닷길은 연합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항해는 매우 어려웠다. 5월이 되어서야 안전지대에 들어왔다. 독일에 여러 차례 전문을 띄웠지만 회신이 없었다. 그 사이 독일은 항복해 버렸고, 유럽의 전쟁은 끝났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모든 전함은 항복하라는 독일 사령부의 명령을 받았다. 펠러는 미국으로 가서 항복했다. 함께 탔던 일본 해군 장교 두 명은 자살하고 말았다. 

 미국이 잠수함을 조사 했을 때 560kg의 우라늄 산화물이 나왔다. 원자탄을 만들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미국은 일본에 원자탄 투하를 망설이고 있었다. 너무 많은 인명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잠수함 사건은 원폭 투하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본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40년 5월부터였다. 핵물리학자 나시나 요시오(仁科芳雄)가 직접 한국의 흥남 질소 비료공장에 핵무기 제조시설을 만들고 원자탄 개발을 이끌었다.

원자탄 재료인 우라늄을 한국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탄을 만드는데 양이 모자랐다. 그래서 동맹국 독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1945년 8월10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 된 다음날이었다. 그날은 일본 정부가 천황페하 대어심(大御心)에 따라 연합국에 항복의사를 알린 날이었다. 그날 흥남 앞바다에서 핵폭탄 실험을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단 한 개만이라도 원자탄이 만들어졌더라면 가미가제의 비행기나 잠수함에 싣고 미국 켈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중요 목표물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에 쫓긴 그들은 1945년 8월15일 항복 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1930년 항일 저항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여 감동을 주었다.

옥스퍼드 대학 바우라 교수는『시와 정치(Poetry and Politics)』(1966년)에서 심훈의 시「그날이 오면」을 세계적인 저항 작가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 등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핵이 없는 <그 날이 오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참고 문헌

(1)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1940년대 일본의 원폭개발 선구자. 일본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일본 최초로 원자핵의 인공파괴에 쓰이는 사이클로트론을 완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 핵실험 외에도 일본 육군 원폭 개발 프로젝트인 '니고연구(二號硏究)'를 이끌었다. 니고란 이름은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이름 첫 글자 '니'로 알려져 있다.  
(2) 김환균(04년 봄), 보해가 만드는 세상, P,6, 
(3) 소련의 작가 의사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뽑혔으나 수상을 거부함 1958
(4) 그리스시인 항해일지 ABC(연습장)의 작가

▲ 김 정 오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겨레역사문학회장
 경기대·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현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지구문학」 편집인, 「시와 수상문학」고문
 광복회 회원, 안중근의사기념관 홍보대사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
 소청문학상, 법무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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