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손바닥만 한 뜰에 약선 식물들을 심었다. 도라지, 취나물, 산부추, 달래를 비롯하여 손에 닿는 대로 구해다 정성껏 심었다. 요놈들이 좁은 땅에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으로서는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이 식물들에게 좁은 공간만 제공하고 마침내 그것을 취하려는 내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탐욕이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순수하게 꽃이나 보면서 몰려오는 나비와 벌을 바라보면서 즐기게 된다면 뱃속은 비었지만 낭만적이고 휴먼한 행위일까?

식물을 가꾸다보면 두꺼운 흙더미 속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육중한 무게일 것 같아 머리에 인 흙을 한 꺼풀 벗겨냈다. 그런데 웬걸, 가볍게 머리를 들고 일어선 식물은 시름시름 잎과 가지를 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게 아닌가…….

나의 행위는 요놈들한테 선의를 베풀기 위한 배려였다. 이런 배려가 식물한테는 유해한 것임을 몇 년간의 농사체험으로 얻었다. 식물에게도 자신이 덮고 있는 흙을 밀치고 올라오는 처절한 노력 없이 지상에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적당하게 도움을 주거나 수고로움을 덜어주면 생존하는데 커다란 유익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치게 도움을 주는 경우에는 습관이 되어 자기 삶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고학으로, 독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이를 극복한 후에 나의 그런 즐거움은 남들이 전혀 모른다. 적은 월급을 타면서도 저축했다. 그러면서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다.

먹고 싶은 것, 보고 즐기려던 것도 절제하면서 집을 장만했을 때 그 성취의 기쁨……. 이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왔다. 참혹한 6·25 전쟁, 그리고 보릿고개, 4·19혁명. 5·16 군사혁명을 겪었다.

필자의 경우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죽음의 언저리에서 서성대기도 했다. 전쟁터에 던져진 자신을 다독이면서 견디어 냈다.

물론 시대상황이 모두가 가난했고 궁핍했다. 잘사는 이웃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상대적 빈곤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절망과 낙담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가르친 <은근과 끈기>의 훈련 덕분이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는 감동과 체험 속에 우뚝 일어서는 이야기가 적다는 게 평론가들의 지적이다. 또 하나 잘못된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국가관이나 민족정통성보다 우선시되는 커리큘럼의 혼란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필자도 한 때 교육을 담당하는 문교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교과서에 일시적인 이데올로기 굴레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관리들의 처신이 부끄럽다. 교육관, 장학관,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같은 책임자들이 이리저리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나 이때나 이들의 행동거지는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치졸한 처사는 보기에도 민망하다.

시대는 급속하게 변하고 사회는 빠르게 혁신을 요구하는데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는 아직도 긴긴 겨울잠에 젖어있다. 그러다 보니 학교 또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비위 맞추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벌어지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교사 폭행에도 오히려 교사들에게 징계를 덧씌우는 사태가 연일 언론매체를 통하여 보도되고 있다.

선생님은 없고 교권도 지켜주지 못할 바에는 교육당국은 간판을 내리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교육, 교사가 홀로 설 수 있도록 학교를 돌보는 교육청이 되어야 한다.

학부모로부터, 폭력으로부터 지켜가는 교권의 확보가 시급하다. 그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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