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을 애도하는 추도식, 수많은 시민들의 마음, 정치적인 삶의 시작,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폭염 속 빈소에는 2만8000명이 찾았다. 1200석의 추도식장은 진작 꽉 들어찼고 입장하지 못 한 시민들이 밖에 서성거렸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남녀노소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분들이 와 주셨다. 세월호 유가족과 삼성반도체 반올림 가족들이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셨다. 정부 관계자와 사법부 여러분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께서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순서를 기다려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해 주셨다.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있고, 기업인도 있고, 청소부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노인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 이런 장례식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정미 대표가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정의당)

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세상을 떠난지 나흘이 지났고 26일 19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그와 진보 정치의 뜻을 함께 품었던 유시민 작가는 하나의 편지를 썼다며 “다음 생에서 또 만나요. 회찬이 형. 늘 형으로 여겼지만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보지는 못 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불러볼게요 형!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세요. 더 자주 더 멋지게 첼로를 켜고 더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쓰고 김지선님을 또 만나서 더 크고 더 깊은 사랑을 나누세요. 그리고 가끔씩은 물 맑은 호수로 저와 단둘이 낚시를 가기로 해요”라며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담배 한 까치 피다 가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한 것처럼 대의가 아닌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 한 것만 같은 삶에 애도를 표했다.

(사진=정의당)
유시민 작가는 노회찬 원내대표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정의당)

실제 인간 노회찬의 삶은 개인적 영달을 위한 것이기 보다 언제나 약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대의’를 쫓았던 궤적으로 가득 차있다.

평생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심상정 의원은 “시대의 부름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고 또 고되고 고된 진보 정치의 길을 앞장서서 헤쳐오신 분이다. 우리 지선 언니(노회찬의 아내)도 엊그제 저한테 투정했다. 그이는 당과 여러분이 99%이고 나는 1%도 아니라고. 그렇게 돌이켜보니까 우리 노회찬 원내대표를 만난지 30년이 됐다. 노 원내대표는 용접공을 하고 나는 구로동에서 미싱사하고 그렇게 알게 돼서 그후 민주노동당부터 정의당까지 그 진보 정치의 험한 노선을 함께 걸어왔다”고 밝혔다. 

심 의원의 묘사대로 정치인 노회찬의 사회적인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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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원내대표와 대화를 침묵으로 했다던 심상정 의원. (사진=정의당)

‘사회 의식’이 싹트다

1972년 부산에서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노회찬은 17세였다. 그해 10월 청소년 노회찬은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을 겪고 충격을 먹었다. 경기고 학생이던 시절 그는 사회과학 공부 모임을 조직하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 정도로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욕구가 컸다.

2017년 3월5일 청년정당 ‘우리미래’ 창당대회에 참석한 노 원내대표는 “16세 참정권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그걸 반대하는 순간 유관순 열사를 불량소녀로 낙인찍게 된다. 나는 17세 때 유신반대를 외치면서 유인물 만들고 뿌렸던 사람이다. 그때 우리미래가 있었다면 입당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슴에서 차오르는 정의감으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던 청소년 노회찬은 이때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의 글을 읽고 사회과학적 인식을 키어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청년 노회찬은 1년 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노동 운동에 힘을 썼다. 당시 ‘위장취업’을 통해 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파악하고 이들의 의식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청년 노회찬은 1982년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그 길을 걸어갔다. 

청년 노회찬은 전두환 정권에서 끊임없이 반정부 시위를 꾀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했으니 당연히 권력의 눈엣가시였다. 그런만큼 오랫동안 수배 생활을 겪어야 했다. 

(사진=정의당)
우리미래 창당대회에서 16세 참정권에 적극 공감한다고 했던 노 원내대표. (사진=우리미래)

본격적인 활동은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노동 운동가’의 삶

30대가 된 노회찬은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라는 거대 노동자 정치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의 세상을 꿈꿨기 때문에 명백히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엄혹한 군사정권 시대에 무모할 수도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은 그랬기 때문에 불의에 강력히 맞설 수 있었다.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노회찬은 재판정에서 당당히 사회주의자임을 인정했다. 

사회주의자가 아닌 시민들도 고문하고 가뒀던(부림사건 등) 군사정권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권력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 운동권 그룹의 역사는 1980년대부터 본격화 됐는데 흔히 민족해방의 NL(National Liberation)과 민중민주의 PD(People's Democracy)로 나뉘었다.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민족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전자, 국가를 독점한 자본가들의 착취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 후자인데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노회찬과 인민노련은 당연히 PD에 가까웠다.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아내 김지선씨. (사진=노회찬 원내대표의 홈페이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전까지 故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과 이에 대항하는 ‘한국민주당’이 여야 제도권 정치 세력에서의 주류였다면, 원외 운동권에는 누가 봐도 NL이 주류였다. NL은 독재정권 당시 미국의 비호 아래 많은 한국인들이 착취당하고 있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주체사상을 선포하고 미제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동경했었다. 

PD는 민중혁명을 통해 다시 제헌의회를 건설하자는 CA(Constituent Assembly)로 진화했지만 인민노련은 NL과 CA가 민중의 삶보다는 이념에 치우쳐져 있다고 보고 새로운 노동 운동을 표방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운동권 내에서의 분화는 후에 대중적 진보 정당인 정의당의 탄생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제도권’으로의 진출 모색

1990년대 들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됐고 소비에트연합은 해체됐다. 사회주의자들은 어쩌면 방황할 수밖에 없지만 30대 노회찬은 제도권 정치 진출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했다. 이때부터 현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민노련도 원내 진출을 위한 중간 조직으로 변경됐고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의 대표를 맡아 본격적인 진보정당 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진정추는 1995년 진보정치연합(진정련)으로 재편됐지만 노회찬은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반대하는 개혁적국민정당(국민정당) 창당준비위원회에 합류했다. 사실 국민정당은 진보정당 건설 조직이라기 보다는 2016년 국민의당과 같이 거대 양당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제3지대 세력과 유사하다. 그만큼 노회찬은 높은 이상을 놓지 않으면서 현실 정치적 질서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유연한 행보를 보였다.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에 나갔던 노회찬 원내대표. (사진=연합뉴스 제공)

국민정당은 꼬마민주당과 합쳐 통합민주당이 됐다. 40대가 된 노회찬은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첫 총선을 준비했지만 김영삼 정부에서 사면복권 대상이 되지 않아 희망을 접게 됐다. 하지만 1992년 설립된 노동전문매체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세대 진보 정치인 권영길을 만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민주노동당’의 탄생

1996년 12월 변형근로제·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노조의 정치활동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이 날치기로 국회를 통과하자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총파업을 감행했지만 자신들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의 부재를 절감하게 된다. 민주노총은 진보 노동계 정당 건설을 주창하고 그렇게 1997년 8월18일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은 1997년 15대 대선에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2회 지방선거에서 최초 선출직 정치인을 배출했고 2000년 1월30일 민주노동당(민노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두 달밖에 안 남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을 목표로 세웠지만 너무 촉박했던지 실패했다. 그러나 2002년 3회 지방선거 실시 전 헌법재판소에서 정당 투표를 따로 하는 1인 2표제를 쟁취해내는 쾌거를 이뤄내 민노당에도 숨통이 트였다. 이때 헌재에서 지역구 투표만 하는 현실에 위헌 판결을 받아낸 주역이 40대 노회찬이었다.  

2007년 1월 18일 한미FTA 6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서울 신라호텔 앞에서 노회찬(왼쪽) 등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협상 중단 촉구 단식농성을 하는 모습
2007년 1월18일 한미FTA 6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서울 신라호텔 앞에서 노회찬 의원 등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협상 중단 촉구 단식농성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기반을 다지고 점점 국민에게 이미지를 각인시켜왔던 민노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드디어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13% 정당 득표율을 차지해 10석을 얻었는데 이중 1석이 49세의 노회찬이었다. 이때 민노당과 노회찬이란 진보 정치인이 전국민에게 알려지게 됐는데 총선 전부터 각종 TV 토론회에 출연해 촌철살인의 말솜씨와 최고의 메타포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삼겹살 판갈이론’도 이때 나왔다. 

당시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노회찬은 KBS <심야토론>에서 “그동안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했다. 이제 퇴장하라.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한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진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다”는 어록을 남겼다.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호주제 폐지, 차별금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발의했고 호주제 폐지는 현실이 됐다. 

민노당의 ‘위기’

잘 나갈 것만 같았던 민노당도 결국 기울기 시작한다. 50대의 노회찬은 진보정치 이합집산의 한 가운데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사실 위에서 언급했듯이 NL은 운동권의 주류다. 민노당이 원내 두 자릿수 의석이 되고 정치적으로 잘 나가다 보니 2005년부터 NL 인사들의 입당 러시가 이어지고 민노당의 주요 당직을 장악하게 된다. 

진보정당 운동에 힘을 써왔던 권영길이었지만 2007년 17대 대선에서 NL의 얼굴마담이나 다름없었고 여기에 대항해 민노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심상정과 노회찬은 반NL 전선의 힘을 받고 있었다. 대선 후보가 된 권영길의 의사보다 NL의 밀어붙이기로 코리아 연방이 대선 공약으로 채택됐고 결국 직전 대선 때보다 표를 덜 받을 정도로 본선에서 참패했다. 

2012년 진보정의당의 당대표가 된 노 원내대표가 6411번 버스 연설을 한다. 

동족이지만 6.25 전쟁을 겪고 반공주의적 잔재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코리아 연방은 그 자체로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남북의 정치체제를 각각 인정하고 하나의 연방 정부를 구축하자는 북한식 고려연방제도와 같은데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 방안이 명시되기도 했다. 

문제는 북한이 주장한 통일 아이디어인데다 내세운 선결조건을 보면 ‘민주화와 정권퇴진·국가보안법 폐지·공산당을 포함 모든 정치활동 보장·주한미군 철수·조미 평화협정체결·미국의 2개 조선 책동과 내정간섭 중지’라서 남한 내에서 거부감이 컸다. 보수 세력의 공격 소재로 쓰이기도 했고 당시 북한의 무력 도발과 핵개발이 빈번했고 독재 정권의 잔혹한 인권 탄압 이미지와 맞물려 ‘종북’ 암흑기를 가져왔다. 

결정타는 2006년 10월 ‘일심회 사건’이었다. 검찰과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장민호를 주축으로 민노당의 최기영 사무부총장·이정훈 중앙위원 등을 구속했다. 북한에 남한의 첩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다.

그때 민노당은 내부에서 색깔론적 탄압인지 진짜 간첩 행위인지를 두고 갈등했고 실제 이적 행위가 드러났음에도 무조건적으로 비호하던 주류 NL ‘자주파’에 맞섰던 심상정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들과 결별 수순을 밟게 된다. 

심 위원장은 너무 과도한 NL식 친북 노선을 청산하자며 2008년 2월3일 일심회 연루자 제명을 포함 혁신안을 상정했지만 이미 지배적이었던 자주파 대의원단에 의해 무산됐다. 수직적인 조직력이 강했던 자주파와 전국구 스타가 있지만 조직력은 열세였던 반NL 평등파는 이때부터 각자의 행보를 밟게 된다.

혁신안에 자신의 재신임을 걸었던 심 위원장은 결국 사퇴했고 평등파와 함께 집단 탈당해 2008년 3월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진보신당’부터 ‘정의당’까지

정의당은 영원한 정치적 파트너인 노회찬과 심상정의 진보정당 건설의 완성체에 가깝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노동 운동을 함께 했으며 분명한 진보적 가치를 공유했지만 이념의 도그마화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민노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뜻을 같이 했다. 

NL과 PD의 차이는 확연하다. 후자가 확실히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자기 노선을 유연하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강하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더라도 공산주의를 내세운 북한 정권이 독재로 나아가면 비판할 수 있고 또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면 노선을 수정해 사회민주주의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노회찬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위해 치열하게 사고했다.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사진=연합뉴스 제공)

군사 정권의 색깔론 공세에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자체 종북주의 성향을 건드리지 못 할 바에는 민노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0석의 결과를 받아들었다. 2010년 5회 지방선거에서 민노당은 민주당과 선거 연대를 추진했고 진보신당은 독자 선거를 치렀다. 노회찬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결국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불러일으켰다는 부당한 비판을 받았고 심상정은 경기지사 선거에서 결국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했다.  

노회찬은 단일화 압박을 받았지만 서울시장 후보로서 청사진을 담은 공약집을 책으로 발간했을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토목건설 위주의 정책을 지양하고 사람에 투자하는 복지 도시 서울을 만들겠다는 그의 공약집은 사실상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에서 많은 부분 실현됐다.

2010년 7월 이정희가 민노당의 대표가 되자 확실히 노선이 탄력적으로 변화했다. 이때부터 진보 대통합설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진보신당의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는 2011년 5월 공식적으로 민노당과 재통합을 추진했다. 이들은 민노당과의 과거 앙금을 풀어갔고 진보신당에서 통합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부결됐다. 2011년 11월 노심조는 탈당했고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해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그리고 민노당과의 3당 통합을 완성한다.

그렇게 최초 원내 진출을 이뤘던 민노당은 해산됐고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통진당)으로 재편됐다. 초대 공동대표로 이정희·유시민·노회찬이 맡았다. 

통진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 역사상 가장 많은 13석을 얻었고 정당 득표율은 10.3%를 기록했다. 이때 57세 노회찬도 서울 노원병 지역구로 출마해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이정희 전 대표는 2012년 대선에 출마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그러나 통진당은 곧 위기를 맞는다. 비례대표 순번 결정 과정에서의 비리가 드러났고 여기서 이석기·김재연 두 당선자에 대한 비판이 거셌지만 이들은 사퇴를 거부했다. 이때 자주파인 당권파와 평등파 사이의 책임 공방이 있었고 진보정당의 집안 싸움을 전국민이 지켜봤다. 

심상정·노회찬·유시민·조준호는 다시 탈당했고 2012년 10월18일 진보정의당을 창당했다. 진보정당의 역사 속에서 평등파는 이제 국민참여당계 천호선·유시민과는 동지가 됐지만 다시는 자주파와 함께 하지 않게 됐다. 

58세의 노회찬은 2013년 2월14일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때 노회찬은 ‘국회를 떠나며’라는 마지막 논평을 내고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국민들이 나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와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니다. 국민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은 아직 남았다. 국민의 심판대에는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노회찬은 정치인으로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법 불신을 강하게 비판했었는데 이때의 대법원 결정에 강하게 불만을 품었던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관예우와 가진 자를 위한 판결을 풍자하는 그의 표현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닌 만명만 평등하다”였다.

2013년 7월21일 정의당으로 당명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네 번의 격변을 거친 결과 정의당·민중당·노동당으로 정리됐다. 

‘노유진’과 정의당

노회찬은 2014년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 동작을에 출마했지만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석패했다. 이 즈음 정의당은 2011년 <나는 꼼수다> 이후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팟캐스트 시장에 나서기 위해 <노유진(노회찬·유시민·진중권)의 정치카페>를 론칭했다. 정치카페는 2년간 100회를 방송했는데 정의당의 브랜드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 정의당과 진보의 가치는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채널A <외부자들>, 유시민 작가와 노회찬의 jtbc <썰전>에서 지속적으로 전파됐다.

노 원내대표와 절친인 박중훈 배우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정의당은 2015년 말 당원 2만명을 돌파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노회찬·심상정 2명만 지역구 당선자가 됐고 나머지 4명(이정미·윤소하·김종대·추혜선)은 비례대표로 겨우 진출했다. 그럼에도 2017년 대선에 출마한 심상정 후보는 201만7458표 6.2%를 확보해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슈퍼우먼 방지법(일과 가정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 보장 확대)을 공약하고 TV토론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정의당은 이정미 대표 노회찬 원내대표 체제로 가게 됐고 ‘제1야당 교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국정농단을 겪은 뒤 반개혁 행보를 보이는 보수야당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정의당은 문재인 정부와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전략으로 갔고 진영논리를 벗어나 사안을 바라봤다. 여기에 노 원내대표의 역할이 컸고 정의당 ‘데스노트’라는 말이 생길 만큼 국무위원 인사 적격 여부를 냉철히 판단한 것은 하나의 사례였다.

2018년 4월 민주평화당과의 공동 교섭단체를 결단한 것도 노 원내대표의 현실적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회에 존재했지만 투명인간 취급받았던 비교섭단체로서의 설움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심상정 의원과 이정미 대표가 노 원내대표의 발인을 하며 울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2018년 4월2일 처음으로 교섭단체 원내대표로서 국회의장 주재 회동에 참석했던 노 원내대표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교섭단체에 참여하는 것과 맞물려 개헌 정국과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인사 논란이 거셀 때 정의당의 행보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중앙정치에 존재감을 높여온 정의당은 작지만 강한 정당으로 남았고 지방선거에서 두 자릿수에 가까운 정당 득표율 8.9%를 기록했다. 선거가 끝난 뒤 창당 이후 최초로 여론조사 지지율 10%를 쟁취했고 한국당을 제치고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노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에 협력하되 개혁에 속도를 내지 않으면 채찍질하는 새로운 야당의 자세를 구축하기 위해 애썼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노선에 맹비난을 하지 않더라도 최저임금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급 외에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최저임금법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비판적인 평화당마저 반대 전선에 동참하도록 만들 정도로 정의당은 확실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 기조를 건드리면 안 되고 중소상공인의 지불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경제민주화 정책을 강력 요구했던 것이 정의당의 방법론이었다. 이는 2019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결정된 뒤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정책 전략으로 그대로 차용됐다. 

노 원내대표가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노 원내대표가 23일 스스로 몸을 던지기 전 남긴 유서를 보면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고 돼 있다.
 
김종혁 jtbc 대기자는 24일 <뉴스현장>에서 “그는 그렇게 스스로의 죄를 따져묻고 선고를 내린 뒤 그것을 집행하고 말았다. 뻔뻔함과 배반이 일상이 된 시대.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의 척도가 돼버린 세상에서 그는 스스로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신념의 삶을 살면서도 염치와 수치를 알았던 드문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클로징 멘트를 했다. 

평생 노동 운동을 통해 대다수 약자들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사람, 그 수단으로 정치와 진보정당을 선택했던 사람. 노 원내대표는 그 대의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온 자신의 삶에 비춰봤을 때 어리석은 실수를 용납할 수 없었고 끝내 뼈아픈 선택을 해버렸다. 노 원내대표의 당부대로 정의당은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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