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은 왜 그의 석방에 분노하는가, 대한민국 어두운 현대사의 산증인, 현재까지 그가 받은 죗값은 징역 1년 반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2018년 8월6일 0시5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서울동부구치소를 걸어 나왔다. 현장은 난장판이 됐다. 김 전 실장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반감이 많은 시민단체와 시민들의 분노감이 압도적으로 컸다. 

김 전 실장이 구치소 문을 나오자마자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전 실장에게 기자들이 질문을 던지려하자 한 남성이 갑자기 앞으로 나와 삿대질을 하며 “야 김기춘. 대한민국 절대악의 축”이라고 소리쳤다. 이후 “XXX야. 무릎꿇고 사죄해라” 등 적나라한 표현들이 난무했고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40분만에 차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차량은 격렬하게 저항하는 시민들에 막혀 한동안 꼼짝도 못 했고 그 와중에 앞유리는 박살이 났다. 직진이 불가능하자 후진을 하며 틈을 노렸지만 후방에도 시민들이 가로막았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전 실장의 차가 빠져나가지 못 할 정도로 시민들은 격렬히 가로막았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2017년 1월21일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의 주요 책임자로 지목돼 구속된 뒤 1년 반(562일)이 흘렀다. 

김 전 실장은 1960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 2016년 박근혜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56년간 권력의 핵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그를 두고 “박정희 때는 유신헌법을 만들고 공안 조작을 했던 공안검사였고, 전두환 때는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를 도우려 해결사를 자처했고 김영삼 때는 복집에서 기관장들 불러 불법 선거를 모의했으며, 노무현 때는 탄핵이 독립운동 우국 충정의 길이라며 앞장섰다”고 서술했다. 

당시 김 전 실장은 1972년 12월 검찰 기관지에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며 미화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김 전 실장은 2013년 8월5일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을 맡게 되면서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렸고 다시 한 번 권력을 휘둘렀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구조 책임이 불거질까봐 유족을 적으로 돌리는 것부터 비판적인 시민단체·언론·유명인사·문화예술단체 가릴 것 없이 모두 권력을 이용해 길들이려는 대상으로 봤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사실로 드러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김영한 비망록(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에 그의 권력 남용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권모술수적 권력 운용은 시민들에게 억압적이지만 국정농단의 주체였던 비선실세 최순실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결국 차 앞유리가 깨졌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시민을 적으로 몰아 탄압하는 정치적 기획자임에도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언제나 회피했었다. 

유신정권의 핵심 통치기구는 누가 뭐래도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다. 중정의 알짜 부서는 간첩 조작을 일삼았던 ‘대공수사국’이고 김 전 실장은 대공수사국장을 4년 반동안 맡았다. 그의 손에서 숱하게 간첩조작사건이 양산됐다. 

현재와 달리 원래 영남권은 사회운동이 가장 많이 발생할만큼 상당히 진보적인 도시였다. 1907년 1300만원을 강제로 제공해 대한제국을 식민화시키려던 일본제국과 맞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전개된 곳이 대구였고, 1946년 미군정의 수탈에 맞선 ‘10월 항쟁’도 대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이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임(1974년 9월)하고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5년간 부산 지역에서 집회 시위 자체가 아예 발생하지 않을 만큼 김 전 실장은 부산 운동권 진영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때 김 전 실장의 나이가 36살이었다. 물론 김 전 실장만 간첩조작사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조직의 총 지휘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그가 간첩 조작을 일삼으면서 북풍 이데올로기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유포시켰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 종북이고 집회 시위에 참여하면 빨갱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가 이때부터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그때 김 전 실장의 손을 거쳐 평생 고통 속에 살았던 피해자들이 최근 들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많다. 

△(1974년)이철 등 민청학련 사건
△(1974년)손두익 전국술 등 울릉도간첩단
△(1974년)김우종 교수 등 문인간첩단
△(1975년)김우철 등 형제간첩단
△(1976년)납북어부 간첩 정규용
△(1977년)김정사 등 재일동포 유학생간첩단

최승호 사장의 질문에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한 김 전 실장. (캡처사진=뉴스타파)

김 전 실장은 2015년 11월20일 김포공항에서 최승호 MBC 사장(당시 뉴스타파 PD)을 우연히 만나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내가 수사한 일은 없다. 그만하자”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런 그였기에 국정농단 이후 문화계 지원배제 혐의로만 감옥에 간 것을 두고 사람들은 허탈해했다. 그럴 정도로 한국 현대사 만악의 중심에는 김 전 실장이 있었다.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1급 공무원에 대한 사직을 강요한 혐의가 추가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2부는 7월27일 김 전 비서실장의 혐의에 대해 전원합의체 회부를 결정하고 석방을 명령했다. 구속기소 상태에서 실형 선고가 내려졌지만 3심이 전원합의체 판단을 받게 됨으로써 형사소송법에 따라 석방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불법 보수단체 지원(화이트리스트) 관련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전 실장이 6월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불법 보수단체 지원(화이트리스트) 관련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형소법 92조에 따르면 구속영장에 대한 구속기간은 2개월이다. 1심은 4개월 추가 연장이 가능하고 2·3심은 각각 6개월씩 연장이 가능하다. 기존 구속영장의 최대치인 1년 6개월을 모두 채웠기 때문에 새로운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 전 실장은 석방될 수밖에 없다.

검찰은 김 전 실장이 세월호 보고 조작사건 및 보수단체 불법 지원사건 관련 1심 재판을 따로 받고 있기 때문에 공소유지 차원의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법원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죗값이 임시적으로는 1년 반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되자 시민들은 격렬하게 분노한 것이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3심과 다른 재판 1심이 진행 중이라 언제든지 다시 구속될 수 있다. 현재 김 전 실장은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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