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재판부의 판단에 동조 아냐, 여성의 일상성 유지와 성적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보호, 민주당의 피해가기 비판, 한국당의 진정성 믿고싶어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여성들이 피해사실을 폭로하기 전까지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다른 행동과 태도를 취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걸 이해하지 못 하고 피해자가 어떻게 일상적으로 그렇게 멀쩡한 생활을 할 수 있었냐고 하는 이 판단은 지금 이 재판부가 도무지 피해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3일 오전 국회 정론관을 찾아 소위 ‘비동의 간음죄’로 불리는 법률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이정미 대표는 재판부의 성 인지적 관점을 비판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이정미 대표는 재판부의 성 인지적 관점을 비판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이 대표는 그동안 법원에서 피해자의 강력한 저항이 있을 때만 강간으로 보는 ‘최협의설’로 성범죄 재판을 해왔다면서 이에 대해 “성폭력이 행사되는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①가해자의 폭행·협박으로 공포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 한 경우 ②저항으로 인해 더욱 심각한 폭행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돼 저항하지 않은 경우 ③수치심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나중에 사실을 알리는 경우 ④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묻어버리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한데. 아직 재판부는 ①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형법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결(8월14일)한 조병구 부장판사(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의 논리를 비판했다.

여성계에서는 안 전 지사에 대한 1심 판결을 놓고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 대표는 “대선 후보이자 상급자인 안 전 지사에 의해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조 판사의 판단과 관련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위력을 좁게 본 것도 피해 여성이 정말 완강하게 물리적으로 저항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중심으로 법원이 판단해왔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위력 개념을 재판부가 잘못 해석했다. 위력은 완력(상대를 제압할 육제적 힘)과 같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피해자의 의사를 침해하는 것들은 “직장 내 사회적 분위기, 피해 여성에게 다가오는 심리적 압박” 등에 따라 다양하고 이것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하는데 너무 좁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판 자체도 문제지만 법률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본인의 의사와 동의 여부를 강조하겠다는 취지로 발의했다”고 밝혔다.  

그런 맥락에서 이 대표는 “본래 간음죄(간음으로 인해 성립하는 범죄)는 사전적 의미로 동의없는 강제적 성행위를 지칭한다. 이른바 비동의 간음죄는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개정안에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강간죄의 하나로 처벌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즉 폭행·협박·위계·위력 등이 존재하지 않아도 명백한 동의 의사를 표하지 않고 이뤄진 성관계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사후 피해자에 의해 법적 문제제기가 된다면 폭넓게 강간죄의 한 종류로 인정될 수 있도록 했다. 이게 비동의 간음죄로 불리는 ‘No means no Yes means yes’ 원칙이고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주요 선진국은 실질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미 도입해놨다.

류하경 변호사는 2월8일 보도된 <씨리얼>과의 인터뷰에서 “외국에는 사전 동의라는 개념을 쓴다. 사전 동의가 없으면 다 거부라고 보는 것이다. 사전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다. 지금은 피해자에게 너무 많이 입증 책임을 주고 있다. 얼마나 취했어? 필름 끊겼다는 걸 입증해봐. 뭐 이런 식이다.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류 변호사는 보통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 패턴에 대해 “성범죄가 일어난 직후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한다. 이것보다 더 심한 가해가 일어날까봐. 어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겠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도 판사나 검사들은 (피해자에게) 물어본다. 그때 저항하지 그랬어. 만지고 난 다음에 싫다고 하지 주위 사람들에게 밖에 나와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피해자 입장에서 내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판사의 재량권이 너무나 많이 좌지우지 하는 것이 성범죄 사건이다. 하지만 판검사들의 성인지적 관점이 많이 딸린다”고 비판했다.  

이번 사건에서 위력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고 밝힌 안희정 전 지사.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 대표는 이번 발의의 기본 성격에 대해 “성폭력 범죄에 관한 법률 체계를 정비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며 형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이 3가지를 동시에 개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게 된다. 

△기존 형법 32장 <강간과 추행의 죄>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죄>로 명칭 변경 
△강간(성교)과 추행(성교 외의 성적 행위)의 정도를 3단계와 2단계로 분류(저항이 곤란한 폭행과 협박·수위가 좀 낮은 폭행과 협박·명백한 거부의사 표시에 반함) 
△양형 문제로 대부분 약식 재판으로 진행되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과 추행’ 법률의 처벌을 15년 이하의 유기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강화

이 대표는 “거부 의사에 반하는 강간죄가 도입되면 성관계를 할 때마다 물어봐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피해 당사자에게 커다란 수치심과 절망감을 안겨주는 범죄다. 무슨 무용담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다. 동의가 없다면 성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류하경 변호사는 확실하지 않으면 물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캡처사진=씨리얼)

이와 관련 류 변호사는 “(피해자의) 유혹인지 아닌지는 이 사람(가해자)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뇌내망상이다. 자기가 그렇게 착각할 수 있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도 (피해자가 유혹한다는) 그 의사를 100% 확신하고 있느냐. 아니다. 그런 것 같았다고 (법정에서) 말한다. 전부. 그런 것 같을 때(애매하면)는 좀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이나 특정 커뮤니티 내부에 지위의 서열 차이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도 문제지만. 흔히 즉석 만남을 통한 성관계를 의미하는 ‘원나잇’이 드문 일이 아니 듯이 남녀가 만나 성행위에 이르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고 그것은 과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조 패러다임을 벗어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의 성적 의사가 확실하지 않으면 성적 접촉을 시도하지 말고 애매하면 차라리 직접 물어보고 의사를 확인하라는 것이 류 변호사의 제안이다. 

정치권은 모든 문제에서 그렇듯이 자기 진영에서 논란이 되면 침묵하고 상대 진영에서 잘못하면 물어뜯게 된다. 

이 대표는 “거부 의사에 반하는 강간죄 도입은 안 전 지사 개인이나 그가 속했던 정당을 향한 정치적 싸움이 돼서는 안 된다. 철저히 여성 인권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이 법안이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6일 jtbc '뉴스룸'에서 공개된 안 전 지사의 카톡 메시지를 보면 사실상 혐의가 인정되는 대목이 있다. (캡처사진=jtbc)
3월6일 jtbc '뉴스룸'에서 공개된 안 전 지사의 카톡 메시지를 보면 사실상 혐의가 인정되는 대목이 있다. (캡처사진=jtbc)

구체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내로남불적 태도(서지현 검사 폭로 때는 바로 논평을 냈지만 안 전 지사 때는 매우 짧은 사과와 제명 조치만 했고 1심 무죄 판결 때 정춘숙·금태섭 의원 외에 공식 논평을 발표하지 않음)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이 대표는 “민주당이 이런 예민한 사안들에 대해 당론으로 뭔가 얘기하지 못 하는 것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지 않는가 싶다. 어느 누구보다 미투에 동참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정당이니 만큼 그것이 자당 소속의 정치인인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이번 재판부의 판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당론으로 입장을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자유한국당은 과거 성추문이 매우 잦았고 올초 미투 정국의 문을 열었던 서지현 검사 폭로 때도 최교일 의원의 연루 의혹 때문인지 하루 동안 침묵을 지켰음에도 연일 민주당 인사(안희정·정봉주·민병두)가 가해자로 지목되자 매우 적극적인 스탠스로 바뀌었다.

이 대표는 이에 대해 “결과가 중요하다. 이 국면에서 안 전 지사 재판 이후 세게 목소리만 내고 책임을 안 지는 그렇게 되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번 발의(나경원 의원 등 한국당의 관련 입법 움직임)는 여성 인권의 보호 차원에서 낸 것이라고 그 진정성을 믿고 싶다. 한국당까지 동의해서 처리하지 못 할 법안은 없다. 반드시 법안이 처리되는 과정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